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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복 후 통도사 초대 주지 지낸 신평 만세운동의 주역

■ 독립유공자 양만우 스님 유족을 만나다
신평장터에서 짚에 불 지르고 만세운동
고문 후유증으로 옅은 보라색 안경 착용
양쪽 엄지발가락도 잘 못써 걸음 불편

통도사 주지로 금강계단 울타리 복원
일제 때 폐교한 통도중 계승한 보광중 설립
“돈오무생”이란 말 남기고 1963년 입적
“통도사 부도전에 스님 부도 세웠으면…”

양산시민신문 기자 / mail@ysnews.co.kr입력 : 2019년 04월 16일
 
↑↑ 독립유공자 양만우 스님
ⓒ 양산시민신문  
통도사 광복 후 초대 주지인 양만우(법명 대응, 이명 무홍. 1897~1968) 스님은 통도오절의 한 분으로 불리고 있다. 통도사를 대표하는 독립운동가 스님이다. 1919년 3월 13일 통도사 신평 만세운동 후 만주로 피신하고, 1922년 강대련 명고축출 사건으로 서대문형무소에서 징역 4월, 집행유예 3년을 선고받았다. 1938년 비밀 항일운동결사체인 만당(卍黨) 사건으로 진주경찰서에 구금됐고, 1941년 통도중학교 배일(排日) 사건으로 양산경찰서에서 3개월간 혹독한 고문을 당했다.

스님은 슬하에 무남 외동딸인 양덕경(1930년생)을 뒀다. 양덕경 어르신은 올해 90살이지만 신체 건강하고 의식도 또렷하다. 세월 탓에 기억이 점점 희미해지고 있지만 양만우 스님과 관련한 기억을 또렷하게 했다. 양산시립박물관에 양만우 스님 유품 일부를 현재 전시하고 있다.

❚ 양만우 스님은 왜 스님이 됐는지요?

집안이 가난해서 공부를 못해 절에 가면 공부를 많이 할 수 있다고 해서 스님이 됐다고 해요. 하지만 독립운동을 하기 위해 절에 들어갔다고 하셨어요. 범어사로 출가했지만, 범어사에서 공부를 안 시켜줘 통도사로 갔는데 구하 스님이 시봉 행자가 많다며 원담 스님에게 보냈다고 해요. 통도사 지방학림과 전문강원, 나중에 보성전문도 다니셨어요.

❚ 구하 스님과는 어떤 관계였지요?

큰아버지라고 불렀지요. 친 상좌처럼 신망했어요. 아버지가 염불, 처세를 잘하고 욕심이 없다고 칭찬을 많이 하셨지요. 족자나 병풍 등 자필로 선물도 많이 줬는데, 다 어디 갔는지 없어요. 아버지도 참 글씨 잘 썼어요. 붓이 아주 큰 것이 있었는데 이것으로 관 위에 덮는 만장을 쓰기도 했지요, 근데 그 붓도 없어졌네요. 벼루도 참 좋은 것이 있었는데….

❚ 혹시 신평 만세운동을 어떻게 했다고 하던가요?

보광전에서 학생들하고 3.1운동을 준비했어요. 신평장터에 달집을 세워 불 지른다고 짚을 많이 모으라고 했는데, 그리고 짚에 불 지르고 만세운동을 했다고 했어요. 당시 스님이 독립선언서를 낭독했지요. 만세운동을 하고 난 뒤 구하 스님이 “기골이 장대하니 잡혀가면 고문이 있을 건데 어찌 네가 주동하냐!”고 나무라며 피신 자금을 100원을 줬다고 했어요.

↑↑ 양산시립박물관 특별전에서 선보인 만우 스님 유품
ⓒ 양산시민신문


❚ 만우 스님이 색안경을 쓰시던데 이유가 있는지요?

스님 눈을 자세히 보면 왼쪽이 안 좋아요. 서대문형무소에 있을 때 고문을 당해서 그래요. 약간 옅은 보라색 동그란 일반 안경이었지요. 또 진주경찰서에 잡혀가서 엄지 양쪽 발가락 고문을 당해 잘 쓰지를 못했어요. 엄지발가락을 수술했는지 재봉선 같은 것이 있었어요. 그래서 걸음도 빠르지 못했어요. 그때 아버지가 잡혀가서 집에 있던 두 상자가량 글이 적혀 있는 종이 뭉치를 언양 방천둑에서 어머니와 같이 태웠어요.

❚ 고문 후유증이 컸겠네요.

컸지요. 스님이 축구를 참 좋아해서 축구선수로도 활동했는데 발가락 다친 뒤에는 공을 못 찼어요. 묘향산 보현사에 계실 때 학춤을 배웠는지 스님이 통도 학춤을 잘 췄지요. 그런데 춤도 못 추게 됐어요. 나중에 김덕명(1924~2015) 씨가 아버지한테 학춤을 배웠어요. 아마 그 사람이 통도학춤인가를 계승했는데 몇 년 전에 나에게 아버지에게 춤을 배운 제자라며 전화도 했었는데, 살아계시는지….

❚ 경찰서나 감옥에 있을 때 고생이 많았겠죠?

아버지가 진주경찰서에 있을 때 어머니가 밤새 솜옷을 만들었는데 옷고름을 없애고 단추를 달아 넣었어요. 옷고름으로 혹시나 자살할까 봐서…. 그때는 아무나 사식을 넣을 수 없었는데 큰이모 아들인 정종철(1948년 부산시장 역임)이 힘을 써서 김치, 고추장, 쇠고기 다진 반찬 등을 넣었지요. 아버지는 독립운동 이야기는 절대 집에서는 안 했어요. 아리랑도 부르지 못하게 했어요. 수시로 형사들이 집에 드나들었어요.

❚ 만우 스님은 예체능에 재주가 많았던 모양입니다.

스님은 한량이셨어요. 특히 목소리가 좋아서 염불과 독경을 하면 사람들이 많이 모여들었어요. 경봉 스님도 양대응 스님 독경을 못 따라간다며 칭찬했어요. 얼마나 소리를 또 잘했는지 평안도 수심가는 절창이었어요. 나는 이제까지 아버지만큼 잘 부르는 수심가를 못 들었어요. 보살들도 참 좋아했어요. 심지어 평안도 기생까지 통도사에 배우러 왔어요. 그만큼 아버지가 소리를 잘 했어요. 또 바둑도 잘 두셨어요. 때로 밥을 잊고서 바둑을 했어요.

❚ 혹 스님과 자주 어울린 사람은 누구였지요?

스님이니까 오택언, 김말복 등 스님과도 친했지요. 그런데 경남도지사를 지낸 김철수 씨가 아버지와 제일 친했는데 욕 친구라 할 정도로 가까웠고 매일 놀러 왔어요. 사랑방에서 두 분이 따로 이야기했는데 독립운동 모의했는지…. 아무튼 김철수 씨는 우리 집에 자주 왔어요.

❚ 아버지에 대해서 어떤 평가를 하고 싶어요?

참, 아버지가 진주 포교사로 계실 때 금광을 해서 돈을 많이 벌었답니다. 돈을 감당할 수 없을 정도로 많이 벌어 가마니에 넣을 정도였어요, 그 돈으로 불우이웃돕기, 학생들 학비 보조, 절에 불사하고 시주하고 했어요, 창호지 장사꾼 오면 종이 다 사주고 잠도 재워주고 참으로 인정이 많으신 분이었어요, 아무튼 훌륭하시고, 머리도 좋으시고, 자상하시고, 도량도 넓으신 분이었어요. 신평 집을 팔아서 물금 용화사 인법당 불사를 하셨어요.

↑↑ 양산시립박물관 특별전에서 선보인 만우 스님 친필 천령문(薦靈文)
ⓒ 양산시민신문


❚ 통도사 광복 후 첫 주지였는데 어떤 일을 하셨지요?

해방 후 초대 주지로 통도사 금강계단 울타리를 석물로 복원했고, 통도사에 전기를 끌어들였어요. 그때 어머니 외사촌이 울산 전기회사에 다녀서 가능했어요. 그때 신평에도 전기가 들어왔어요. 일제강점기에 폐교된 통도중학교를 계승해 보광중학교를 1946년 설립했지요. 그 후 양산 내원사, 물금 용화사 주지로 있었어요. 용화사 석불좌상(보물 제491호)을 낙동강 너머에서 가져왔는데, 작은 불상은 배가 흔들려서 빠졌다고 해요.

❚ 만우 스님 마지막 모습은 어땠나요?

스님은 1968년 췌장암으로 입적하셨어요. 어머니는 93세까지 사셨는데…. 입적할 때 용화사에서 좌탈입망하시겠다며 보름 정도 곡기를 끊으셨지요. 이 세상에서 가진 속을 비우겠다고 서원하면서…. 치료도 변변하게 하지 못하고 쑥뜸기로 치료할 정도였지요. “돈오무생(頓悟無生, 문득 깨닫고 보니 생은 없더라)”라는 말을 남기셨어요. 참, 보현사에 계실 때 조실 스님에게서 관세음보살상을 선물 받았는데, 입적하실 때 상좌스님에게 보관하다가 통일되면 돌려주라고 했데요.

❚ 마지막으로 하고 싶은 말은?

스님께서 입적하고 난 뒤 사리가 많이 나왔는데 어머님 친구들이 와서 보시다가 작으니까 잃어버리고 해서 5과 정도만 남았어요. 이제라도 통도사 부도전에 양만우 스님 부도를 세웠으면 합니다. 통도사 광복 후 초대 주지요, 독립운동가니까 통도사에 모시는 것이 당연하다고 생각해요.

세 시간 이상의 문답에도 양덕경 어르신은 지친 기색도 없이 기억하고 있는 것을 말씀하셨다. 기억은 때론 시간이 지나면 왜곡되고 섞이기도 하지만 유족의 증언은 소중하다. 통도오절의 한 분인 양만우 스님을 기억할 수 있는 형상물이 통도사에 있어야 하겠다.

대담_이병길(보광중 교사ㆍ시인ㆍ향토사학자)
양산시민신문 기자 / mail@ysnews.co.kr입력 : 2019년 04월 16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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