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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산시민신문

[이기철 시인과 책 숲 산책(散冊)-68] ‘고마워’로 ..
오피니언

[이기철 시인과 책 숲 산책(散冊)-68] ‘고마워’로 마칠 수 있는 삶

홈페이지 담당자 기자 119@dkbsoft.com 입력 2023/12/14 09:57 수정 2023.12.14 09:57
마리카의 장갑/ 오가와 이토

이기철
시인
오랜 기간 라트비아는 얼음 제국(소련) 지배하에 놓여 있었다. 그들이 그토록 사랑하는 노래도 부를 수 없었고 춤도 출 수 없었다. 고유 민속 의상 착용도 허락하지 않았다. 다만 ‘엄지 장갑’만은 허용했다. 방한용품이자 축제 때 화려함을 꾸며 주는 도구 역할도 하는데(라트비아어로 ‘침디’), 따지고 보면 삶을 따스하게 감싸주는 말 없는 연대(連帶)다. 그들은 집안에서 기르는 가축에게도 장갑을 만들어 주는 전통을 지니고 있다. 지금도 이 나라를 여행하는 관광객들에게 최고 인기 상품이기도 하다.

이 소설은 ‘엄지 장갑’을 둘러싸고 펼쳐지는 가족사이지만, 촘촘하게 ‘나’, ‘너’, ‘우리’, ‘나라’를 생각하게 한다. 동화 형식으로 풀어나가지만, 굴하지 않는 민족정신과 그들이 보여주는 공동체 정신이 가진 힘을 잘 느낄 수 있다. 한 여성이 겪은 파란만장한 생애를 따라가다 보면 결국 ‘사랑’이라는 종착역에 이르게 된다. 겉으로는 눈부시게 아름다워도 속내는 눈물이 나올 정도로 그리운 장면도 곳곳에 배치돼 있다. 행복이란 일상에서 발견하는 작은 기쁨이자 감동이지만, 이를 지켜내기 위해서는 얼마나 노력이 필요한지 경험해 본 이들은 안다.

이야기는 주인공인 ‘마리카’(‘자애로운 어머니’라는 뜻)가 태어나는 시점에서 시작해 나이순으로 전개된다. 손녀 탄생을 앞두고 할머니는 엘크 빗장뼈를 갈아서 만든 바늘과 뜨개실로 장갑을 짠다. 장갑은 온기를 나눠준다는 의미다. 생명을 환대(歡待)하는 마음이 녹아있다. 목공 장인인 할아버지는 손녀가 커서 사용하게 될 나무 그릇을 준비해 둔다.

‘마리카의 장갑’ 책 표지.

아빠는 세 아들과 한 가구당 한그루만 허락된 크리스마스트리에 사용될 가문비나무를 베러 숲으로 간다. 나무를 얻어 돌아오는 길, 호두 한 알을 발견한다. 아빠는 나눠 먹는 법을 아이들에게 말해보라 한다. ‘형님 먼저, 아우 먼저’ 갑론을박이 이어지지만, 모두 정답은 아니다. 아빠는 ‘평등’을 강조한다. 똑같이 골고루. 호두 이야기는 소설 마지막 즈음에 다시 등장한다. ‘마리카’는 한발 더 나아가 심어야 한다고 말한다. 열매가 풍성해져 많은 사람이 함께 먹을 수 있을 때까지 길러야 하는 법이라고.

그녀는 무럭무럭 자라 ‘엄지 장갑’을 스스로 짤 수 있게 된다(이 나라는 수공예 시험이 있다. 통과하지 못하면 그 나라에서 살 수 없다). 5일 동안 치러지는 시험에 그녀는 겨우 합격한다. 보결(補缺) 입학.

마라카는 성숙한 여인이 되고 사랑에 빠지게 만든 남자가 나타난다. 춤 동아리 회원인 청년 ‘야니스’. 그녀는 그에게 뜨개질한 장갑을 만들어 주기로 마음먹는다. ‘장갑은 편지’를 대신하는 일이라서. 이 선물을 받게 되면서 그들 사랑은 출발한다. 상대방 요구에 ‘예스’라는 말은 필요하지 않다. ‘받아들임’이 곧 허용이다. 그들은 결혼에 골인한다. 하지만 불행도 뒤따라온다.

나라는 전쟁에 휩싸이고 얼음 제국측은 남편을 강제 추방해 버린다. 조국을 버리라는 강요다. 둘 사이에는 아이가 없다. 유일한 사랑을 뺏어갔다. 떠난 지 5년, 어느 날 우체부가 전해주고 간 소포. 그 안에 진흙투성이가 된 왼쪽 엄지 장갑 한 짝이 들어 있었다. 간단한 편지와 함께. 그 장갑을 주운 사람이 쓴 “길거리에서 주웠습니다. 장갑 안에 주소가 있길래 보냅니다”라는 한 줄 문장.

‘고마워’(paldies)라는 문구가 새겨져 있는 떡갈나무 잎.

마리카는 장갑 안에서 떡갈나무잎 한 장을 발견한다. 나뭇잎에 구멍을 뚫어 쓴 ‘고마워’(paldies). 이 책에서 세 번 나오는 단어다. 할머니로부터 장갑 뜨기를 배운 후 감사함을 표할 때, 그녀가 여행을 떠날 때(죽었다는 표현을 이렇게 한다고), 그리고 이번 편지에서다. 그녀는 이 나뭇잎 편지를 야니스가 남겨놓은 시작(詩作) 노트에 가만히 끼워 뒀다.

또 함께 들어 있던 칠엽수 씨앗은 둘이서 데이트를 하던 숲속 근처에 심었다. 몸에 지니고 있으면 좋은 일이 생긴다는 씨앗은 그렇게 자라나기 시작했다. 두 사람이 키워 온 사랑처럼.

어느덧 남편이 떠난 지 19년이 흘렀고 그녀 나이 오십에 이르렀다. 이제 남은 것이라곤 마당 한 켠 그네, 함께 보던 무지개, 그 사이로 느꼈던 비, 바람, 햇볕 등등. 마리카는 이제 자신을 위한 장갑을 짠다. 얼마나 솜씨가 좋은지 멀리서 소문을 듣고 사람들이 찾아와 그녀에게 장갑을 주문할 정도였다.

얼음 제국 폭정은 끝나지 않았다. 여전히 끌려가고 고문당하고 폭행은 다반사로 일어나고 있었다. 이러한 어려운 상황임에도 웃음을 잃지 않았다. ‘슬퍼한다고 나아지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는 점을 잘 알고 있어서다. 미소는 그녀 트레이드마크였고 용기를 나누는 방법이었다. 마침내 나라는 독립을 얻었다. 평화를 찾은 지 7년 만에 그녀도 먼 여행을 떠났다. 야니스 곁으로.

오가와 이토 작가는 이미 우리에게 익숙하다. ‘달팽이 식당’, ‘츠마키 문구점’ 등을 통해서. 이 소설 맨 뒤에는 부록처럼 그림과 사진이 곁들여진 기행문 한 편이 실려있다. 라트비아를 동행 취재했던 일러스트레이터 히라사와 마리코 작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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