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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산시민신문

[이기철 시인과 책 숲 산책(散冊)-73] 그리움을 멈추..
오피니언

[이기철 시인과 책 숲 산책(散冊)-73] 그리움을 멈추기 위해 쓴다

홈페이지 담당자 기자 119@dkbsoft.com 입력 2024/03/28 09:37 수정 2024.03.28 09:37
마음의 홀씨, 편지/ 방희숙

이기철
시인
다산 정약용은 가족에게 많은 글을 남겼다. 평소 엄격하게 자신을 지키라는 훈계를 자주 내렸다. 이를 가계(家戒)라 하는데, 집안 규율이나 가정 교육 지침을 뜻한다. 특히, 그는 유배당한 몸이라 직접 챙기지 못해 요즘 말로 하면 ‘원격 교육’을 많이 했다. 자신도 견디기 힘든 상황에 놓여 있으면서도 멀리 있는 이들에게 안부를 묻는 동시에 결코 다른 생각이나 게으르지 말 것을 신신당부했다.

일본 여배우 키키 키린이 생전 ‘걸어도 걸어도’ 등을 만든 영화감독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과 주고받은 여러 이야기를 담은 교감(交感)은 그녀가 세상을 뜬 지 10일 뒤인 2018년 9월 25일, NHK ‘클로즈업 현대+’라는 프로그램을 통해 추모 특집 방송까지 한 적 있다. (그녀는 감독의 페르소나였다) 다산과 키키 키린, 두 사람이 남긴 공통점은 ‘편지’였다. 그 속에는 참으로 뜨거운 정과 아쉬움, 격려뿐 아니라 섭섭함, 어떤 분노까지 포함돼 있었다.

이 시대에 흔히 ‘손편지’는 유물(遺物) 취급받는 형편이 됐지만, 서간문(書簡文)은 과거가 아니라 현재를 여행하는 자에게 여전한 힘이 된다.

방희숙 작가가 최근에 펴낸 ‘마음의 홀씨, 편지’를 꺼내 읽은 이유다. 아버지와 남편으로부터 받은 편지와 그녀가 남편에게 답장한 편지에 이어 그때그때 단상(斷想)들을 모아 시(詩)로 마무리했다. 40년이 훨씬 넘은 시간, 주고받은 이야기지만, 생생한 육성처럼 지금도 여전히 유효하다. 고향을 떠나 타지에서 생활하던 1979년부터 오고 간 편지가 마침내 45년 만에 지상(紙上)에 소개된 셈이다. 내용은 총 4부로 구성돼 있다.

‘마음의 홀씨, 편지’ 책 표지.

환갑 기념으로 책을 출간하게 됐다는 글 속에 “친정아버지와 주고받았던 편지가 글쓰기 씨앗이 됐다”는 부분은 결코 그녀 겸손이 아니다. 항상 그녀 편이었고 ‘문학가’가 되길 빌었다는 말이 가장 기억에 남는다는 남긴 머리글, “이른 아침 대나무 빗자루를 뉘어 마당을 쓸고 계신 아버지, 쓸 때마다 흙이 파이지 않게 조심해야 한다”던 아버지는 짧아진 빗자루 키만큼 작아져 돌아가신 지 오래다. ‘나무가 고요 하고자 하나 바람이 그치지 아니하고, 자식이 효도하고자 하나 부모가 기다리지 아니한다’고 했다지.

먼저, 아버지 이야기부터 들어보기로 한다. 생전 한문(漢文)에도 밝고 서체도 깔끔, 반듯해 마을 사람들은 경조사가 있을 때 찾아와 부탁하느라 마루가 닳을 지경이었다고 한다. 작가도 큰 영향을 받았지만, 서툰 짓은 종종 지적받았다. 식육점(食肉店)을 식육점(食育店)이라 쓴 부분을 명확히 가려내 바로잡아 준 사실은 평생 잊지 못하고 있다.

부모는 ‘걱정을 달고 사는 존재’다. 가까이 두고도, 멀리 있어도 늘 그러하다. 편지는 늘 자식 생각에 애가 탄다. 내용은 대동소이하지만 달리 무슨 말이 더 필요할까?

친정아버지가 보낸 편지봉투.

두 번째는 남편이 보낸 편지다. 중매로 결혼한 지 50여일 만에 생이별(?)한다. 신랑은 외항선 통신사. 1988년 10월 첫 만남 이후 한 달 만에 결혼했다. 연애는 건너뛰었다. 애틋한 감정이 싹트기도 전에 말이다. 바다 위에서 부친 남편 편지에도 그런 후회와 자성(自省)이 절절하게 드러난다. 남녀 간 만남이라는 게 그리 쉬운 일인가. 사랑은커녕 정조차 느끼기 전에 시집살이부터 시작해서니 말이다.

어색한 마음을 누르고 부른 ‘여보’에서 ‘당신’, ‘님’으로 전진하는 호칭을 보고 있자니 슬그머니 입가에 미소가 번진다. 신랑은 편지에서 부탁한다. “부부생활부터 시작했지만, 서로의 가슴에 사랑을 심어봅시다”라고. 그녀는 마음을 추스르고 책과 그녀가 좋아하는 음악을 골라 녹음테이프를 보내는 일로 응답한다. 지치고 힘들 때 힘을 내라는 응원이다. 다행히 남편이 통신사여서 전보(電報)는 자주 쳤으나, 편지는 보내는 일도 받는 일도 시일이 오래 걸리던 때였다. 그 기다림을 정지시킨 방법이 편지였다. 요즘은 메시지, 톡, 전화 어떤 방법으로도 신속하게 의사 표현을 할 수 있지 않은가.

말은 물과 같이 흘러갈지도 모르지만, 글은 남는다. 말은 가슴에만 남지만, 글은 여전히 숨길 수 없는 현실이고 증거고 증표(證票)다. 사랑하는 사람끼리는 남기는 일이 필요하다. 방 작가 편지는 그런 점에서 매우 의미 깊다 하겠다. 이런 시(詩)를 적어뒀다.

 

그대
그때 그 마음을
여기에 놓아주니
꽃처럼 피어나 빛나네
어제처럼 변함없이 웃어주는 게
얼마나 힘든가
오늘도 어제처럼 너는 웃고 있구나
<‘아지랑이’ 전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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