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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산시민신문

[강서동] 모두가 정겨운 이웃사촌, 유산마을..
사회

[강서동] 모두가 정겨운 이웃사촌, 유산마을

양산시민신문 기자 입력 2003/09/06 00:00 수정 2003.09.06 00:00
아버지와 아들, 아재와 조카가 초등학교 동창

비 개인 뒤의 강서동 유산마을은 밝은 햇살아래 고요하고 평화롭다.
사람 좋아 보이는 이 마을 통장 강인탁(46세) 씨가 기자를 반갑게 맞는다.
"전임 통장님이 오랫동안 봉사해 오시다가 갑자기 별세하시는 바람에 생각할 겨를도 없이 통장을 맡았습니다."

칠순의 전임 통장이 돌아가시고 40대의 자신이 통장이 된 것이 이제 겨우 1년. 마을 주민들이 젊은 통장에게 거는 기대가 커 어깨가 무겁단다.
기자가 찾아온다고 마을과 관련된 각종 자료들을 미리 준비해 놓고 있는 정성으로 보아 마을 주민들의 기대를 저버리지 않을 듯싶다.

이 마을이 자리 잡고 있는 이곳은 원래는 주거지가 아닌 농경지로 이쪽 마을에서 바라보이는 건너편의 비봉산 자락에서 이곳으로 이주해 와서 새마을을 이루었다 한다.
"그 때가 1978년이었으니까 벌써 25년이나 지난 일이네요. 옛 마을이 있던 자리에 지금은 고려상사’가 들어 서 있습니다."

강 통장이 건네 준 자료에 따르면 옛 유산마을은 서북으로 우뚝 솟은 비봉산(飛鳳山)이 서남으로 뻗어 협곡을 이루고 다시 솟아 고장성(古長城)으로, 그 아래 동남쪽으로는 장자곡(藏資谷), 유산고분군을 거쳐 너른 평야와 만나며 북쪽으로는 `대마등`(大馬嶝)을 거쳐 어곡 새목과 접한다. 마을의 동쪽으로 어곡천이 흐르고 그 옆으로는 양지등(陽地嶝)이 상북면과의 경계를 이루고 있다.

옛날 양지등에는 양정사(陽正寺)라는 사찰이 있었는데, 그 아래의 양지소(陽地沼)는 얼마나 깊었던지 명주실 한 타래가 다 들어갔다고 전해진다. 또 그 옆에 배나무소(沼)와 어사소(御使沼)가 있었는데 용이 못된 `이심이(이무기)`가 살면서 송아지를 잡아먹었다고 하는 전설이 전해지고 있다. 마을 앞으로는 북천(양산천)이 완만히 흘러 삼성동 북정리와 경계를 이룬다.

또 마고성(麻姑城)에서 뻗어 내린 줄기는 들 가운데 나지막이 타원형의 야산을 이루고 있는데, 이름하여 반월산(半月山)이라 불렀다 한다. 남서쪽에는 옛 윤산역(輪山驛, 후에 由山驛이 됨)의 옛터가 있었다 하는데 지금은 공업단지가 되어 옛날의 흔적은 찾아 볼 수가 없으니 아쉽기 이를 데 없는 일이다.

옛 유산마을은 본래부터 민간인이 살던 자연촌락이 아니고 국가기관인 우역(郵驛)이 설치된 곳이었다 한다. 우역은 나라의 관리들이 공무로 여행할 때 쉬기도 하고 교통수단(말)의 편익을 제공받던 장소로서 공문서 전달 및 조공의 운반업무 외에도 군사, 경찰기능 등도 겸하던 기구였다. 우역이 처음 설치된 것은 신라 소지왕 9년(487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유산역의 설치 연대에 대한 정확한 기록은 없으나, 1425년(세종 7년) <경상도지리지> 양산군. 역(驛)편에 황산(黃山), 위천(渭川), 윤산(輪山)의 3개역이 기록되어 있어 그 역사가 매우 오래되었음을 보여 주고 있는데, 윤산역은 원래 황산역의 속역이었다.

유산마을이 자연촌락으로 변모한 것은 1884년 우역의 혁파로 유산역이 없어지면서부터이다.
그러다가 근래 1978년 유산공단의 조성으로 마을전체가 공단부지로 변하면서 그곳에 살던 마을주민들이 이곳으로 옮겨와 마을을 조성한 것이 지금의 유산마을이 된 것이다.

반듯반듯한 집들이 마치 지난날 대도시에 세워졌던 국민주택 같다.
"가구 수는 46가구지만 세대 수는 113세대입니다. 그만큼 세입자들이 많다는 얘기죠. 인구 320여명에 65세 이상의 노인 분들이 30여분이나 되는데 이 어르신들이 소일하실 수 있는 일거리를 찾아드리는 게 저의 최대관심사입니다."

그리고 또 하나의 관심사는 마을주민들의 단결과 화합. 다행히 ‘유산향우회’가 활성화 되어 있어 이를 통한 마을 젊은이들의 결속이 매우 단단하단다.
"봄, 가을 체육대회나 등반대회 같은 때는 고향을 떠나있는 친구들이 다 모입니다. 인근 부산 울산은 물론, 대구, 서울 등 멀리서도 찾아와 고향사랑을 불태우고 친구들 사이의 우정을 다지고 있지요."

이곳은 양산의 다른 곳과는 달리 토착민들이 60%나 된단다. 강 통장 자신도 3대째란다. 그러니 주민들이 모두 ‘어곡초등학교’의 선후배고, 아버지와 아들, 아재와 조카가 동창이다.

날마다 옛정취가 사라져가고 있는 것이 아쉬운 오늘날, 한 마을이 가족처럼 옹기종기 모여살고 있는 이런 마을의 정겨운 모습은 쉬 사라지지 말고 오래오래 남아있으면 좋으련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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