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러나 <오아시스>는 생각만큼 간단하지 않다. 작위적이고 신파적일지도 모른다는 일말의 선입견을 얄팍한 속임수나 현란한 잔재주 없이 우직하게 관통한다. 감독은 홍종두와 한공주의 사랑을, 전과자와 지체장애인이라는 불안하고 아슬아슬한 조합에서 느껴지는 그대로, 가슴 서늘하고 절절하고 먹먹하게 보여준다. 일체의 수식어나 미사어구 없이. 한공주 역을 맡은 배우 ‘문소리’의 온몸을 비트는 연기가 계속될수록, 사랑하는 두 남녀를 바라보는 사회의 싸늘한 시선을 바라볼수록, 둘을 이용해 먹는 주위 사람들의 비열함을 목격할수록 관객은 점차 말이 없어지고 불편해진다. 급기야 종두가 공주의 강간범으로 몰리면서 벌거벗긴 채 쫓겨나고 경찰서에 끌려가는 장면에서는 불편함의 정체가 들어난다. 그것은 종두와 공주의 가족들이 비록 비열하긴 하나 충분히 그럴 수도 있겠다는 측은함이 드는 리얼리티를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 의미에서 종두와 공주의 가족을 연기한 배우들의 호연은 빛나 보인다. "아! 저런 상황이면 저럴 수도 있겠어." 라는 생각이 "나도 저 사람들과 똑같이 저 둘을 대할지도 몰라." 혹은 "이미 대하고 있어."라는 생각으로 발전하게 되면 불편함은 더욱 가중되는 것이다.
하지만 영화가 그 불편함에 잠식당하지는 않는다. 그러기에는 영화가 던져주는 메시지가 가슴 흔들릴 정도로 진심어리고 아름답다. 영화 보는 내내 시종일관 불편했던 관객이라도 종두가 공주를 위해 경찰서를 탈출해서 공주집 앞의 나뭇가지를 잘라내는 장면에서는 가슴 한 구석이 뭉클하지 않을 수 없다. 공주에게 있어 가장 무서운 것은 벽에 붙은 오아시스 그림을 가리는 나뭇가지 그림자였던 것이다.
이창동 감독은 계몽을 위해서 영화를 만들지는 않았다고 했다. <오아시스>는 그저 전과자와 지체장애인이 편견과 핍박에 시달리면서도 여느 다른 연인들처럼 "사랑하였으므로 진정 행복한" 모습을 담담하게 보여준다. 소외 계층을 바라보는 자신의 시선에 대해 반성할지 영화가 던지는 메시지에 순수하게 감동할지는 오로지 관객의 몫이다.
영화는 지난 해 여름에 개봉해서 평단과 관객의 열렬한 지지에 힘입어 그해 늦가을까지 극장에 걸려 있었다. 나는 가을이 무르익던 9월의 마지막 주 어느 날에야 영화를 봤었는데 덕분에 그해 겨울이 끝날 때까지 따뜻하고 행복한 가슴이었다. 전문적이고 지극히 영화적인(대게는 골치 아프기 일쑤인) 평을 떠나서 영화를 만든 감독의 진심이 느껴지거나 보고나서 마음이 움직여지는 영화가 좋은 영화라고 나는 생각한다. 사랑이 위대하고 아름다운 것은 사실이다. 그것이 가치 있다는 것도 사실이다. 사랑의 지극히 단순한 그 사실들을 그야말로 ‘사실적으로’ 보여줄 수 있는 <오아시스>같은 영화가 공허한 이야기들이 판치는 극장가에서나 슬픔이 만연하는 사회에서나 모두 그립다.
시민기자 전건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