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단법인 국악협회 양산시지부 부지부장으로 활동하면서 현재 남부동에 위치한 국악 학원을 경영하고 있었다.
- 어떻게 국악을 시작하게 되었는지?
“제 나이 열아홉 살 때 여성국극을 봤습니다. 거기에 반했죠. 그 화려하고 아름다운 모습에 말이죠. 여성국극은 전통의 창과 춤, 그리고 연기가 한데 어우러지는 우리 특유의 공연예술입니다.”
여성국극에 반해 국악을 하게 되었다는 조갑님씨는 그 당시를 회상하며 여성국극을 창을 거들어 설명해 주었다.
여성국극은 1902년 세워진 황실극장 ‘협률사’에서 대화 창 형태로 시작된 창극의 한 형태이고 창극은 판소리로부터 유래했다. 지금은 그 명맥만이 남아있지만 50~60년대는 최고의 인기를 누리던 문화가 바로 여성국극이다.
젊은 시절 여성국극에 반해 국악을 접하게 되었다는 조갑님씨는 여성국극을 단원으로 활동하기도 하였다고 한다.
“그 때는 그냥 밥 먹어주고 잠 재워주며 그것으로 만족했습니다. 노래하고 춤 출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충분했을 때죠.”
그러나 어디 현실이 그런가? 결혼하고 애 낳고 살다보니 국악하고는 인연이 끊어졌다. 하지만 배운 것이 그것뿐이라서 사십이 되어서 다시 국악을 시작하게 되었다고 한다.
다시 국악을 시작 한 곳은 대전이었다.
대전에서 많은 공연을 하면서 여러 대회에도 참가하여 상도 받았다.
- 대전에서 양산으로 오게 된 계기가 있습니까?
“아들이 하나 있는데, 아들이 사업하다가 실패를 했습니다. 다시 살 길 찾아서 오다 보니 양산에 들어와 살게 되었지요. 그게 벌써 6년 전 일이네요.”
양산에 와서 처음에는 아들 뒷바라지한다고 2년 정도는 쉬었다고 한다.
그러나 다시 소리가 하고 싶고 노래와 춤이 그리웠다고.....
그리고 그 당시 IMF로 경기가 어려웠고 거기에 아들 하던 일도 힘들어졌었기 때문에 무엇보다도 아들 혼자 벌어서는 살기가 힘들었다고 한다.
그래서 학원을 차리고 다시 소리와 춤을 추기 시작했다.
- 양산에서 국악을 하는데 힘든 점이 있다면..?
“아직 양산에는 국악에 대해 관심이 없는 것 같습니다. 사람들이 아직 민요와 판소리를 제대로 구별 못하고 있는 실정이구요. 또 배우려는 사람들이 많지가 않습니다. 여기 양산은 맞벌이 부부가 많아서 그런지 주부들이 배우려 오지 않고.. 배우로 온다고 해도 잠시 취미로 1~2달 와서 기초만 배우고 가고 있어요. 사실 판소리 같은 경우에는 평생 목을 쉬게 하면 안되는데 말이죠. 여기엔 국악을 전공하고자 하는 사람이 없는 실정입니다.”
그래서 장년에는 경영 상 어려움으로 국악학원을 허가 취소를 하기까지 했었다. 조갑님씨는 양산에 국악을 자리 잡게 하기 위해 무료 공연도 하고, 광고도 내보고 했지만 그렇게 큰 관심은 받지 못하였다고 한다.
“제가 배울 당시만 해도 악보라는게 없었지요. 선생님이 선창을 하면 그것을 따라하면서 배웠습니다. 지금은 악보도 있고, 글이 있어 누구나 쉽게 배울 수 있답니다. 그렇게 배우기 힘든 것이 아닙니다. 국악은 우리 것인데, 우리 몸 속에 있는 피데, 조금만한 관심과 열정만 있다면 배우는 것은 힘들지 않습니다.”
사실 양산은 전반적으로 문화에 대한 관심도가 낮은 편이다. 특히 우리의 것인 국악에 대해서 더욱 그렇다.
요즘은 학원 강사나 유치원 교사들이 찾아와서 배운다고 한다. 배워서 아이들에게 우리 것을 가르치기 위해서 말이다.
우리가 우리 것을 모르면서 우리 것을 우수성을 말하는 것은 우스운 일이 것이다. 우리는 우리 것을 제대로 알아야 할 의무가 있다고 생각한다. 우리 것을 제대로 알고 다른 문화를 받아들일 때 타 문화에 잠식당하지 않고 문화주체로서 자립할 수 있지 않겠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