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제 태풍이 왔다 갔는지 모를 정도로 쾌청한 날씨와 양산의 피해가 그렇게 크지 않다는 소문만 듣고 편안한 마음으로 원동방면 지방도(1022호)로 들어섰지만 태풍의 참상은 거기서부터 벌써 시작되고 있었다.
5분 남짓 원동 화제로 들어가는 도로변에는 태풍으로 기울어지고 넘어진 전신주와 뿌리째 뽑혀 넘어져 있는 아름드리나무들, 붉은 흙탕물이 되어 무서운 기세로 흐르고 있는 낙동강 저편의 김해 상동면의 공단지역도 물에 잠긴 채 건물들만 물위로 얼굴을 내밀고 있는 것을 보면서 점차 태풍 ‘매미’의 위력이 얼마나 대단했는지 실감이 갔다.
화제리 명언부락 삼거리에서 ‘배내골’이라는 이정표만 물 위에 떠 있을 뿐 어디에도 도로의 흔적은 없다. 작년 ‘루사’의 피해로 지방도(1022호)수해복구 공사를 하고 있다는 정태문(46) 현장소장은 “올해 잦은 비로 공사를 제대로 할 수 없었는데 연례행사처럼 치루는 물 피해를 근원적으로 해결했으면 좋겠다”.는 말을 하면서 원동면 사무소로 가려면 수자원공사앞으로 우회해서 가란다. 화제 쪽의 피해를 주민들에게 물으니 외화마을 황덕임(84)할머니가 집이 붕괴되면서 깔려 목숨을 잃은 인명피해를 비롯해서 돼지 축사가 대거 파손되는 등 크고 작은 피해가 하고 많아 제대로 집계도 못했단다.
물에 잠긴 논들과 처참하게 부서진 비닐하우스와 토사로 덮여 버린 밭들에 이르기까지 올 한해 유독 날씨로 고통 받고 있는 농민들의 가슴에 마지막으로 일격을 가한 자연의 재앙이 원망스럽기까지 하다.
폭격을 맞은 것처럼 유리창이 박살이 난 원동면 사무소에서 고무신에 무릎까지 바지를 걷어 올린 채 땀 냄새에 찌든 옷차림으로 전화로 누구에겐가 고함을 치고 있는 박말태 의원과 정영현 면장은 전투를 지휘하는 지휘관 같은 느낌이 들었다.
잘 차려입은 양복차림이 아니라 뻘물이 묻고 며칠째 갈아입지 못한 옷차림으로 현장을 지휘하는 두 사람을 보면서 그나마 분노하는 농민의 마음을 누그러뜨릴 수 있지 않나 싶다.
작년 ‘루사’ 때는 배수펌프장이 물에 잠기고 저지대인 원동면 사무소 일대가 물에 잠기는 피해를 보았지만 이번 ‘매미’는 배수펌프장이 정전이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발전기를 가동해서 원동면 사무소 일대의 물 피해를 피할 수 있었다고 한다.
‘매미’가 상륙했던 12일부터 비상근무를 하고 있는 공무원들과 주변 주민들로부터 14일 현재까지의 상황들을 받아 적으면서 이틀사이에 엄청난 일들이 일어났음이 느껴진다.
13일 오후에는 용당리 ‘가야진사’ 근처에 딸과 함께 고립되어 있던 한미자(36)씨가 강 건너 김해 쪽으로 살려달라고 소리쳤고 김해 상동 여차리 사람이 듣고 김해 경찰서 상황실을 거쳐 양산 경찰서와 양산소방서 119에 접수, 소방서 구조대원들과 정영현 면장 등 공무원들이 보트를 타고가 고립되어 있는 부녀를 구출했다는 가슴 뭉클한 사연도 들었다.
전화로 수자원공사 밀양댐 관리 단에 생수지원을, 한전에 전기선로 복구를 요청하는 박말태 의원의 고성에 깜짝 놀라다가도 그 큰 덩치로 여기저기에 도움을 요청하는 자세가 여간 날렵하지 않다.
피해상황을 취재하고 있던 중 이번 태풍 원동면 피해현장에 두 번 다녀갔다는 신희범 부시장이 생수와 라면을 싣고 관계공무원들을 대동하고 면사무소에 나타났다.
신희범 부시장, 박말태 의원, 정영현면장, 적십자사 양산지부의 이영숙(56, 중앙동)전 회장과 보트마다 라면과 생수를 싣고 고립되어 있는 용당들(당곡, 신곡, 중리)로 가기 위해 배에 올랐다.
낙동강물이 역류해 들어오고 용당들에 둑이 터져 온 들이 물바다로 변한 상황에서 그 많았던 딸기 하우스는 찾을 길이 없었고 나란히 서있는 전봇대만이 그곳이 길이라는 걸 짐작케 할 뿐이었다.
배 위에서 바라보는 용당들은 차라리 물속에 잠겨 고요하다.
이 많은 물이 빠지고 나면 펄 속에 쑥대밭이 되어 있을 시설 하우스나 채소밭은 또 어떻게 복구할 것인가.
50여만 평 넓은 용당들, 1500동의 시설 하우스, 이지곤(중리)이장은 94농가가 731만본의딸기 모종을 정식했기 때문에 모종 종자대만 어림잡아 11억 정도 손실이란다.
신곡에서 하선하여 다시 걸어서 철길을 따라 피난민 행렬처럼 상 하행선의 열차를 피해가며 1.5Km를 걸어 고립무원의 중리 마을에 도착했다.
13일 오전 3시부터 침수가 된 중리 마을주민들은 57세대 180여명의 주민이 음식과 물을 나눠 마시며 견디고 있다며 가져온 생수와 라면이 반갑다기 보다 분노를 넘어 한탄에 가까운 항의를 한다.
해마다 연례행사처럼 겪어야 하는 물난리가 진절머리 난다며 이지곤 이장은 말한다.
“대부분 낙동강 수계에는 제방이 되어 있지만 중리, 당곡, 신곡만 제방이 없어 매년 침수가 될 수밖에 없다. 농사를 안전하게 지을 수 있도록 제방을 만들어 주든지 아니면 아예 정부에서 사유지를 구입해야한다. 제방을 만들어 달라고 국토관리청에 건의했지만 강폭이 1km가 안되면 제방을 쌓을 수 없다는 대답만 들었다. 용당들 사람들이 매년 겪어야만 하는 고통을 조금이라도 이해한다면 규정만 가지고 이야기 할 수는 없다”
지자체나 시 의회의 힘만으로는 도저히 불가능한 사업이라 중앙부처에 계속 건의 하겠다는 박말태 의원의 이야기와 신희범 부시장의 최선을 다하겠다는 대답이 전부일 수밖에 없다.
중리의 피해가 극심하다지만 신곡이나 당곡의 피해도 만만찮다.
작년 ‘루사’의 피해로 둑이 두 군데나 무너져 농사를 망쳤고, 올해는 한 군데가 더 터져 완전히 농사는 포기해야할 상황이다. ‘루사’ 피해복구 비용으로 37억이 배정되었지만 아직 공사 착공조차 못하고 있는 실정이다.
시설 하우스가 모두 파손되어 하도 어이가 없어 술 마시고 있다며 신곡마을 박대상(58, 신곡)씨와 이희원(59,신곡)씨의 분노도 만만찮다. “작년에 터진 둑을 임시로 복구했지만 올해 다시 터져 5만평의 농토가 토사유입으로 완전히 매몰되어 버렸다”며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다고 한숨이 깊다.
작년 ‘루사’ 피해로 건교부에서 수해복구비용으로 배정된 37억은 다른 용도로 사용할 없는 행정의 난맥상이 여실히 들어나는 부분이다. 그 지역에 살고 있는 주민들의 여론을 수렴하지 않고 중앙 부처의 책상에서 결제된 돈은 결국 하등 소용도 없이 올해도 피해를 곱으로 입은 것이다. 현재 동산건설이 제방공사를 하려고 하지만 흙을 가져올 취토장 확보도 안 된 상태이고 토지 보상도 어려운 상태라 언제 공사가 재개될지 미지수다.
박말태 의원과 신곡마을 배타관(67)이장은 근원적인 대책으로 야산을 깎아 낮은 지역을 매립하고 주민들을 이주케 해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인다. 15년째 이장직을 수행하고 있는 배타관이장이나 원동 출신 시의원의 이야기를 귀담아 들어볼 일이다.
취재하는 기자가 대안을 만들어 낼 수 없음이 안타까운 사실이만 용당들의 수해현장을 여러 사람과 돌아보면서 해마다 겪어야하는 수해를 똑 같은 방식으로 대비해 봐야 농민들의 상처만 깊어 갈 뿐이라는 생각이다.
매년 원동면 공무원들은 밤잠을 설쳐가며 분노하는 주민들을 다독여야하고, 주민들은 주민들 나름대로 행정에 대한 불신이 쌓여만 가는 악순환의 고리를 끊어야 하지 않을까.
“농민은 이 나라의 국민이 아니다”라는 절규가 내년에는 나오지 않도록 지역 국회의원이나 지자체가 힘을 모아야 할 때인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중앙정부에서 복구지원비가 내려오기 전이라 하더라도 지자체 차원에서 먼저 복구비 지원과 대파비 지원 등 할 수 있는 지원을 아끼지 말아야 하겠다.
어둑어둑 저물어 가는 태풍 ‘매미’의 피해 현장을 보고 돌아오는 배 위에서 한시 바삐 원동 주민들이 수해로부터 자유로운 때가 오기를 기도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