웅상읍의 명곡리와 이름이 같아 가끔 혼동을 자아내게도 하지만 웅상의 명곡은 椧谷이고 중앙동의 명곡은 明谷으로 한자로는 명확히 구분된다.
시내에서 동쪽으로 4㎞정도에 위치하며 남쪽으로 동면, 북동쪽으로는 웅상읍과 경계를 이루고 있다. `양지` `음지` `새마을` 3개의 자연마을로 형성되어 있는 150여 세대에 인구 410여 명의 도심 속 작은 촌락인 여기에 양산대학이 자리 잡고 있다.
이 마을 통장 권재돈 씨 농장에서 권 통장, 그리고 지난 10여 년간 마을의 이장과 통장 일을 보았다는 김창우(49세) 씨를 만났다.
"여기는 말이 양산시지 농촌산골과 다를 바 없습니다. 그런데도 시지역이라고 농촌지역이 받을 수 있는 혜택은 하나도 받을 수 없습니다." 김창우 씨의 말이다.
이를테면, 이전에 농촌개량사업의 일환으로 화장실개량이라든지 재래식부엌을 입식부엌으로 개량할 때 주어지던 보조금과 지원이 이제는 일체 끊어져 버렸단다.
물론 농어촌지역 고교생들에게 적용되는 대학진학 특례도 여기는 해당되지 않는단다.
그러면서도 시 지역 시민으로서 누릴 수 있는 문화혜택은 전혀 미치지 않으니 차라리 양산면, 양산읍으로 불리던 옛 시절이 그리운가 보다.
"대중교통도 이곳은 홀대를 합니다. 몇 번이나 건의도 하고 사정도 했지만 버스가 여기는 들어오지 않으려 합니다. 승객이 적어 수지가 안 맞는다는 말이겠죠." 권 통장이 김 씨의 말을 거든다.
아닌 게 아니라 이곳을 드나드는 버스는 구포~명곡 간이 하루에 8차례, 부산~명곡 간은 고작 3차례밖에 안된다. 아이들의 등ㆍ하교나 어른들의 출ㆍ퇴근길이 여간 어렵지 않겠다 싶다.
"어릴 때, 초등학교 다닐 때는 5㎞ 학교 길을 걸어 다녔습니다. 점심 때 하교를 하면 해질 무렵이 되어야 집에 도착했는데 그래도 오는 도중에 개울에서 가재도 잡고 물장구도 치면서 놀던 일이 아름다운 추억으로 남아 있습니다."
"지난날에는 우리 마을이 시내 초등학교 아이들 소풍 오는 곳이었습니다."
그만큼 경치가 좋다는 자랑으로 들린다. 비록 개발과 발전에서는 소외되어 있고 이에 따른 불만이 적지 않으련만 두 사람의 마을에 대한 애착이 각별하다 싶다.
김 씨는 이 마을 토박이로 농사를 짓고 있고 권 통장은 경남 산청이 고향으로, 이 곳에 온지 14년째란다. 축산과 농사를 하고 있는데 하는 일에 그럭저럭 재미가 붙었단다. "이젠 여기가 고향이나 다름없다"며 밝게 웃는 모습이 건강하다.
"우리 마을 뒷산에 `메살방구` 라는 것이 있었고 `처녀방구` `총각방구`도 있었다는데 그게 지금은 다 없어졌어요."
도로가 나면서 잘려 나갔는지 아파트와 대학이 들어서면서 없어졌는지 알 수 없단다.
-메살방구라뇨?
"우리 고장에서는 메아리를 메사리라 안합니까. 그리고 방구는 바위를 말하는 것이고요. 그러니까 메살방구라 카는 것은 `메아리바위`라는 말이죠."
김창우 씨의 이어지는 설명에 따르면 마을 뒤쪽으로 바위가 마치 병풍처럼 둘러져 있고 이곳에 오면 마을 저 아래쪽에서 나는 작은 소리도 다 들렸다 한다. 그래서 마을 어른들이 이곳에 메사리, 즉 메아리가 산다고 하여 바위 이름도 메살방구라 했단다.
`처녀방구` `총각방구`는 무슨 말이냐는 질문에 갑자기 두 사람의 표정에 묘한 웃음기가 번진다.
"지금은 없어졌지만 영락없이 처녀 총각의 그것(?)을 닮은 바위 두 개가 있었습니다. 그 생긴 모양새가 누가 봐도 틀림없는 그 모양들이었죠."
그렇게 말하면서 그것들이 없어져 버린 것이 마냥 아쉬운 표정이다.
권 통장집 근처에 `장군묘`가 있다고 하여 그를 재촉해 그곳으로 가 봤다.
-威勇將軍固城縣令 僉知中樞府事 梁山李公 諱八仝之墓碑- 라는 비문이 비석 앞면에 적혀있다. 뒷면을 보니 병조판서 장강공(莊剛公)과 정경부인(貞敬夫人) 김해 허씨(金海 許氏)와의 사이에 태어난 태종갑오년생(太宗甲午年生)으로 칠원현감, 고성현령, 첨지 등을 역임하였다고 기록되어 있다. 숙부인(淑夫人) 전의 이씨(全義 李氏)와의 사이에 윤조(胤祖), 윤환(胤環) 두 아들을 두었는데 각각 좌위부사직(佐衛副司直)과 금산군수를 지냈다는 기록도 보인다.
전해 오는 이야기로는 이 장군이 동래 금정산에서 이곳으로 활을 쏘면서 애마(愛馬)를 달리게 하여 화살과 경주를 시켰는데 말이 화살보다 조금 늦었다하여 그 자리에서 말의 목을 베었다고 한다. 목을 베긴 하였으나 아끼던 말의 죽음을 애석히 여겨 근처에 말을 묻었다 하는데 지금까지도 남아있다는 말 무덤은 확인하지 못했다.
마을을 떠나면서 고개를 들어 쳐다보니 마을 뒤편으로 양산대 쪽에서 월평으로 넘어가는 도로공사가 한창이다.
개발과 발전의 삽질이 미치지 않아 아직도 옛정취가 많이 남아있는 명곡마을- 그러나 그로 인해 주민들의 생활이 불편하기 이를 데 없다하니 `개발`과 `보존`이 어떻게 조화를 이루어야할지?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 모두의 숙제가 아닐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