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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산시민신문

[하북면] 영취산 아랫자락 지산마을..
사회

[하북면] 영취산 아랫자락 지산마을

양산시민신문 기자 입력 2003/10/04 00:00 수정 2003.10.04 00:00
산수 빼어난 장수마을

통도사를 오른쪽으로 에둘러 구불구불한 비탈길을 올라가 맞닥뜨리는 곳이 하북면 지산리 `지산 본 마을`이다. 사실 지산리라 하면 통도사를 에워싸고 있는 일대를 총칭하는 말이다.

영취산에서 남으로 뻗어 내린 여러 능선 중 산박등(큰 산 바깥의 등) 능선에 위치한 지산리는 지산, 평산, 서리가 3각형으로 자리 잡고 있으며, 통도사 창사 이래 사하촌(寺下村)으로 널리 알려져 사찰과는 깊은 연관이 있는 마을이 곧 `지산마을`이다. 그러나 이곳 본 마을은 통도사 한참 위쪽에 자리 잡고 있으니 엄밀히 따지면 `사하촌`이 아니라 `사상촌`인 셈.

지산에 터전을 잡기 위하여 이곳에 처음으로 들어 온 사람은 김해 김씨(金海金氏)로 알려져 있다. 지금도 남아 있는 묘의 입석(立石)에 "장사랑(將仕郞)(종9품의 문관 벼슬) 김해김공(金海金公) 함풍10년(咸豊十年)"이라고 쓰여 있는 것으로 보아 이들 옛 선인들의 이주 시기는 대략 1800년경으로 추산된다. 중국 청나라 문종 때의 연호인 함풍 10년은 1860년이니 이 어른의 살았을 때를 감안, 1800년경으로 보는 것이다.

한편 조선 철종 때(1850-1863)에 남원 양씨가 독짝골(지산 동북쪽에 있던 옛 마을로 6.25 때 폐동 되었음)에 들어왔다고 하나 기록은 없다. 전해 오는 말에 의하면 지산(芝山)이란 명칭은 진시황의 신하 서복(徐福)이 불로초를 구하러 동방으로 왔다가 이곳에서 영지(靈芝)를 구했다고("영지 구하다"라는 뜻의 비가 있었다고 함) 하여 붙여진 이름이라 한다. 또 달리는 지산(芝山)이란 영취산이 와우(臥牛)형이라 칭한 후에 붙여진 이름이라고도 전한다.

평산은 원래 부듸골(부도 마을) 또는 당골이라 부르다가 1914년에 평탄한 산에 위치한 마을이라하여 평산(平山)으로 불리어졌다 한다. 아래 위 만복재가 동네를 둘러싸고 있으며 이 곳에서 바라다 보이는 마을 뒤쪽의 영취산 주능선의 경관은 가히 장관이다.

1914년 서리를 포함하여 지산리(芝山里)라는 법정(法定) 마을이 되었으며, 그 이전에는 초산리(草山里)에 포함되어 있었다.

이 마을은 원래 농업이 주업이었으나 천년고찰인 통도사와 주변 자연경관을 찾는 이들이 늘어나면서 농업인들이 민박집이나 특산물식당업으로 생업을 전환하면서 바야흐로 관광업이 부상하고 있으며, 내년부터는 `농촌체험마을` 조성사업이 본격화 될 예정이어서 이에 대한 마을주민들의 관심이 높다고 한다.

"3, 4년 전까지만 해도 우리 마을을 `장수마을`이라고 불렀습니다. 지금은 연로한 어르신들이 많이 돌아가셨지만…" 마을 이장 최학용(70세) 옹의 말이다.
산수가 이리 빼어난 곳이니 당연히 장수하셨으리라.

"이곳이 개발제한구역이라 가옥구조개선을 할 수 없어 민박을 하는 것도 쉽지 않아요. 개발이 안 되니 자연히 땅값도 내려가고, 요 근래 마을을 떠난 사람들이 많습니다."
통도사에서 등산로나 골짜기 입구를 통제하는 것도 우리 마을로서는 곤란한 점입니다."

관광객들이 애써 이곳까지 올라와 봤자 산으로 더 들어갈 수 없으니 다시 더 찾지 않는다는 것이다.
마을 오른 쪽으로 돌아가니 `八道僧之禁地石`이라는 돌 푯말이 보인다.
"이 비석의 해석에는 두 가지 설이 있습니다. 하나는 조선의 숭유억불정책에 따라 대원군이 `팔도의 중들은 들어올 수 없는 땅`이라는 뜻으로 세웠다는 것이고, 또 하나는 `이곳은 팔도 중 명산이기 때문에 중들은 돌을 쌓지 말라`는 뜻이라고 전해지고 있습니다."

재미있다. 무심코 서있는 돌 하나가 한 시대의 흐름을 말없이 전하고 있으니…
최 이장을 따라 마을 뒤 산으로 올라가 봤다. 백년은 훨씬 넘었음직한 노송들이 껍질이 까진 채 속살이 칼 같은 날카로운 것으로 무수히 긁혀있는 자국이 눈에 띈다.

"일제 때의 흔적입니다. 남정네들은 징용에 끌려가고 남아있는 아녀자들은 송진을 채취해 왜놈들에게 공출했는데 이것이 바로 송진을 캐낸 자국이랍니다."
`아, 여기도 역사의 상처가 남아 있구나` 세월이 적잖이 흘렀건만 상처는 아물지 않고 그 때의 그 아픔을 말해 주고 있다.

서서히 어둠살이 끼기 시작하는 산길을 내려오며 최 이장은 김해 김씨 산소에 얽힌 전설을 들려준다.
"저 아래 산소를 함부로 건드리면 재앙을 입는다는 말도 있고, 또 누구라도 제일 먼저 벌초를 하면 복을 받는다는 전설이 있어 마을 사람들이 서로 다투어서 벌초를 하는 바람에 문중에서 벌초를 하지 않아도 될 정도입니다."

전설이 아니더라도 이것이 이 마을의 인심이려니… 내 조상 남의 조상 가릴 것 없이 선대 어른들의 유택을 돌보려는 마음이 참으로 갸륵하다 싶다.
마을버스 정류소까지 따라와 배웅을 하는 `지산마을` 이장 최학용 옹의 눈매가 더없이 순하다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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