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9월말부터 10월 초순, 양산시내와 웅상읍 거리 거리에는 한 국군용사의 귀환을 환영하는 현수막이 내걸려 지나는 행인들의 눈길을 끌었다.
"이재학 옹?"
이 낯선 이름에 다들 의아한 눈빛을 보냈지만 곧 이 이름의 주인공이 양산시의회 이부건 의원의 부친이라는 것이 알려지면서 시민들의 관심은 날로 고조되었다.
이 옹이 마침내 고향에 돌아왔다는 소식이 전해진 8일 오후, 웅상읍 삼호리 564-1, 이 옹의 아들 이부건의원의 집에는 수많은 환영객들이 몰려들었다.
일가친척들과 환영객들에게 둘러싸여 감격에 겨워있는 이 옹께 인사를 올렸다.
"그저 모두가 고마울 따름이죠. 감사합니다" 얼굴 가득 밝은 웃음을 담고 카메라 플래시를 받는다.
이 옹의 모교인 웅상초등학교에서 구해 온 빛바랜 사진 두 장을 보여 드렸다. 한 장은 웅상초등학교의 전신인 4년제 웅상공립보통학교 제6회 졸업사진, 다른 한 장은 6년제 서창공립심상소학교 제10회 졸업사진이다.
각각 4268년과 4272년으로 표기돼 있으니 1935년과 1939년으로 풀이하면 되겠다.
4년제 보통학교를 졸업하고 학제개편에 따라 6년제가 된 소학교에 다시 들어가 또 한번 더 졸업을 했다는 아들 이 의원의 설명이다.
"아, 이게 나로구만. 내가 그 때는 제법 별난 아이였지"
세월의 필름은 68년 전으로 뒷걸음치고 팔순 노인은 어느새 동심으로 돌아간다.
"얘가 김선분이구만, 얘는 천금성이고. 그때는 학생이 다해 봐야 서른 명도 안 되었어. 여학생은 두 명뿐이고. 아, 얘는 주진 살던 아이야. 얘는 석계 살던 아이고. 지금까지 살아있는지 몰라?"
아들은 물론 집안 어느 누구도 사진 속의 누가 이 옹인지 몰랐던 터라 단번에 옛 친구들까지 알아내는 노인의 생생한 기억력에 다들 혀를 내두른다.
몸은 북에 있으면서도 마음은 애오라지 남녘의 고향 산천과 옛 벗들에 머물러 있었던 까닭이리라.
53년- 자동차로도 10시간이면 넉넉할 그 길이 어찌 그리도 멀었을까? 떠났던 길을 다시 돌아온 세월이 53년이나 걸렸다니…
-부친이 생존해 계신다는 것을 언제 아셨습니까?
"지난 8월이었어요. 국정원에서 아버지가 살아 계신다는 소식을 전해주었지요."
-그럼 그 전에는?
"돌아가신 줄로만 알았지요. 육군에서도 전사자로 처리해 통보해 주었으니까… 제가 스무 살이 될 때까지 연금도 수령하고 50년 가까이 제사도 모셨습니다. 돌아가신 날짜를 모르니까 음력 9월 9일에 제사를 모셨죠."
그러나 남쪽의 아들은 남ㆍ북 이산가족 상봉이 이루어지기 시작하던 무렵부터 은근히 `내 아버지도 살아 계실지 모른다`는 막연한 기대를 가지게 된다. 그래서 중국땅을 넘나들기를 여러 차례. 그래도 북쪽 아버지의 소식은 깜깜하기만 했다.
아버지 없이 자란 세월, 두 돌이 갓 지난 어린 아들이 자라 소년이 되고 청년기를 거쳐 지천명에 이르도록 아들 이부건 의원의 지난 세월은 얼마나 신산(辛酸)스러웠을까? 69년에는 청상아닌 청상의 세월을 사시던 어머니마저 세상을 떠나셨다.
"한 편의 드라마였죠. 큰집에 들어가 할머니 밑에서 자라다 장성해서는 외국생활도 꽤 오래했고…"
그랬으리라. 그래도 지금은 이 지역사회의 지도급 인사가 되었으니 지난 아픈 세월이 그저 속절없었던 것만은 아니었던가 보다. 그는 시의원이 된 지금도 영산대 정보경영학부에 학적을 두고 만학의 열정을 불태우고 있다.
이런 아들을 만난 아버지의 마음은 또 얼마나 흐뭇하였으랴.
북의 아버지는 아들이 죽은 줄로만 알았다. 당시 남쪽에는 홍역이 창궐했고 북에서 전해 듣는 남쪽 소식은 부정적으로만 가공된 처참한 소식뿐이었을 테니까…
`그 어린 것이 어찌 살았을꼬. 필경 죽었을 게야`
그런데 죽었을 줄로만 알았던 그 아들이, `부건`이라는 이름 두자만 지어주었을 뿐인 그 아들이 이렇게 시의원까지 될 정도로 어엿하게 자라주었으니 그 감격과 고마운 마음을 어찌 말로 다 나타내랴.
그러고 보니 팔순 노구로 어떻게 북쪽 땅을 탈출했는지가 궁금하다.
"죽기 전에 내 부모님의 산소를 찾아 절 한번 올리려는 일념뿐이었어. 잡히면 바로 총살이지. 그렇지만 이제 나이 80이 된 내가 목숨 아까울 게 뭐 있겠어. 이리 죽어나 저리 죽어나 마찬가지 아닌가"
아, 그렇구나. 부모님에 대한 애틋한 효성이 이 노인으로 하여금 그토록 목숨을 건 결행을 하도록 한 에너지였구나. 아무리 부모님 받드는 효심이 우리 겨레 심성의 원형질이라 하더라도 과연 부모님 산소 성묘를 위해 목숨을 걸 사람이 몇이나 될까 싶어 그저 가슴이 뭉클하다.
-결코 북에 전향을 하지 않으셨다면서요?
"전향을 하셨으면 북의 주류사회에 편입돼 그런대로 편안한 삶을 사셨을 텐데…"
아들에게는 아버지가 북에서 겪었을 고초가 못내 가슴 아픈가 보다. 그래도 끝내 훼절하지 않고 대한민국 국군으로서의 지조를 지킨 아버지가 아들로서는 더없이 자랑스럽다. 그랬으므로 오늘 이 옹의 귀향이 이토록 영예로운 것이 아닌가.
"나는 남쪽 사람이다. 결코 너희들에게 손을 들 수 없다"
그래서 돌아온 결과는 너무나 가혹했으니 탄광 노동자 등, 비참한 억류생활로 53년의 기나 긴 세월을 삭혀야 했다.
긴 시간이 흐르고 바깥엔 어느새 어둠살이 끼치는데도 방문객의 발길은 끊이지 않는다. 그래도 이 옹은 여전히 화기 넘친 밝은 모습으로 찾아오는 이들을 맞는다.
-어르신께서 건강해 보이십니다.
"지금은 반가운 마음에 그렇겠지만 나중에 혹 몸져누우시지나 않을까 걱정입니다."
그렇겠다. 사선을 넘은 긴장감과 내일을 기약할 수 없는 중국생활, 그리고 조국의 품으로 돌아온 뒤에도 관계기관을 들러 소속부대에서의 전역식.
숨쉴 틈도 없는 바쁜 일정을 보내셨을 테니 쌓인 피로가 이만저만이 아니시리라. 그런대도 저토록 의연한 자세를 보이고 있는 것은 다만 꿈에서 조차 그리던 고국땅과 고향땅을 밟은 환희에 겨워서이시려니… 이제 좀 쉬셔야 하리라.
"앞으로 아버지의 여생을 어떻게 즐겁고 보람되게 보내시도록 해 드리나 하는 것이 저의 숙제입니다. 이제 곧 구체적으로 아버지를 위한 프로그램을 만들 생각입니다"
쉰 고개를 훌쩍 넘겨서야 얼굴도 모르던 아버지를 찾은 아들의 얼굴에 아버지를 향한 남다른 결의가 엿보인다. 두 부자분이 오래 오래 복되고 행복하시기를 마음속으로 빌며 이 의원 댁 대문을 나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