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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산시민신문

[강서동] 예부터 선비가 살았던 마을 회현..
사회

[강서동] 예부터 선비가 살았던 마을 회현

양산시민신문 기자 입력 2003/10/11 00:00 수정 2003.10.11 00:00

양산여중·고를 지나 회현 본마을에서 정좌영 이장을 만났다. 한번도 고향인 회현 마을을 떠난 본 적이 없다는 정좌영 이장을 통해 회현 마을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다.
회현 마을은 향교 등 중허리 기슭에 남향으로 자리잡고 있다. 회현동에 사람이 정착한 연대는 정확히 고증할 수는 없으나 약 500년은 넘은 것으로 보고 있다.

조선시대 이전부터 곡포(曲浦)지역에 사람이 정착해온 듯 하다. 특히 조선 태조 6년 향교창설 이후 많은 교생들이 거주하였던 것으로 여겨진다. 현재에는 200가구 353세대가 살고 있으며 본 마을에는 30가구가 살고 있다. 본 마을은 농사를 짓는 전형적인 자연 마을 형태를 띠고 있다.

회현동의 마을 이름은 조선조 이후 명명된 것으로 보이는데 일반적으로 대부분 향교 부근에는 `유림들이 모여있다(會賢)`는 뜻을 지닌 회현동 마을이 존재하였다고 한다. 회현 마을 한자가 모일 회(會) 어질 현(賢)이다.

이 지역 역시 교리 향교 옆에 많은 교생들이 모여 살아 `회현`이라는 이름을 갖게 된 것으로 보인다.
"예부터 회현 마을은 선비들이 모여 살았던 마을로 알려져 있습니다."
풍수지리적으로도 회현 마을은 좌청룡 우백호로 선비가 많이 나온다고 정이장은 말했다.

현재 양산의 갑작스런 인구증가로 회현동은 비록 옛 모습을 잃어 가고 있는 듯 하나 지금도 이 지역에 자리잡은 양산 여자 중·고등학교는 오랜 세월에 걸쳐 자리잡힌 유풍이 한순간에 사라지지는 않는다는 점을 보여주고 있는 듯 하다.

회현 마을이 속한 교동은 1990년부터 창조, 협성 등의 아파트 단지가 들어서면서 인구가 급격히 증가하였다. 1978년 유산공단 설치 당시 행정구역상 법정리 교리는 교동, 회현동, 신주동, 양동의 4개 행정마을로 구성되어 있었다. 이때 양동은 유산공단으로 편입되고 2가구가 남아 있다.

또 1983년 2월 15일 행정구역 개편으로 교리, 유산, 어곡은 물금면에서 양산읍으로 이속되었으며, 신주동은 물금면 범어리로 편입되었다.
현재는 강서동으로 행정마을은 교동, 회현 마을, 강변 마을 등 3개 마을로 구성되고 있다. 다른 마을은 분동 되면서 이름이 바뀌었으나 회현 마을은 옛 이름 그대로를 사용하고 있다.

마을 뒤 북서쪽 500m 지점에는 연대 미상의 회현사(會賢寺)가 있었다고 한다. 현재에는 절터만 남겨져 있다고 한다.
"조계종 태고사인 ‘회현사’라는 절이 있었다고 합니다. 일제시대 전에 화재로 사라졌다고 하더군요. 절터는 남겨져 있는데 숲이 우겨져서 들어가기도 힘듭니다. 사실 관리가 안 되고 있는 관계로 절터라고 하지만 별로 볼게 없죠."

관리가 소홀히 되고 있어서 절터가 있다고는 하나 모양은 거의 남아 있지 않은 상태라고 한다. 거기다 절터가 있는 곳까지 들어가기도 힘들어 주민들도 나서서 관리할 수가 없다고 했다. 이름만 남겨져 있을 뿐이었다.

서남쪽으로는 화제고개로 가는 좁은 산길이 있고, 산길 서쪽 100m 지점에 `탕건(갓 안에 쓰는 작은 모자) 바윗골`이 있는데 옛 회현동의 홍수시 탕건암의 남은 부분이 탕건 모양이었다고 전해지고 있다.

지금도 이 곳에는 패총이 산재해 있고 이 위쪽에는 불선암이 솟아 있다. 앞산에는 `은(銀)정골`이 있고 향교 등 9부 능선 흑암등(검등바위골) 옆으로는 금을 캐냈다는 `파금터골`이 있다고 한다.

정월 대보름날이면 마을 주민 모두 모여 마을 앞 당산할배 나무에 제를 지내고 있다고 한다.
"마을 사람들은 대부분 참가하고 있습니다. 마을 행사인데 빠지는 사람은 없죠."
마을 사람들이 협동이 잘 되고 있음을 은근히 자랑했다. 어느 마을이든 마찬가지로 회현마을도 인심 좋고, 하늘이 맑은 마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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