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석 마을 부녀회장 정계화씨를 만나 소석 마을에 대해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다.
상북면 소재지에서 남서쪽으로 약 1.6Km 거리에 위치하고 있으며 앞쪽으로 양산천이 흐르며 뒤쪽에 천마산을 두고 그 기슭에 늑동, 제리골, 장재편, 제리당의 군소 4개 자연 부락으로 이루어졌으며 張(장)자 성씨를 가진 장자가 살았다하여 장제편, 말발굽자리에 위치하였다 하여 늑동, 말의 몸퉁이 놓인 자리를 제리당이라 하였다. 현 제리골은 적입골이라 하였다 한다.
1991년 소석리를 제리당과 늑동을 소석 마을로 장재편과 제리골을 장제 마을로 분동 되었다.
전설에 의하면 마을에 신라시대 한 장자 모씨가 살았는데 원효대사가 원효암을 창건시 1,000여명의 수도승 창양을 시주하였으나 마음이 좋지 못한 장자의 부인이 과객을 못 오게 하기 위하여 한 술사에게 과객이 오지 못할 방법을 문의하였던 바 장자 집 맞은쪽 냇에 자라형상의 바위가 있는데 자라목에 해당하는 부위를 짤라 버리라고 하여 자라 목 부위를 잘라 버렸더니 결국 살림은 기울고 집안에 우환이 가득하여 패망하므로 찾아오는 사람이 없어졌다. 후일에 인륜에 어긋나는 과욕을 삼가라는 교훈으로 전해오고 있다.
약천터는 소석리 산 7번지 하단에 위치하였으며 아직 그 원형이 살아있다고 한다. 약 70년 전까지만 해도 많은 사람이 찾아왔다 하는데 나병환자도 완치되었다는 유래가 전해오고 있다고 한다. 그만큼 소석 마을이 물이 좋고 공기가 좋다는 말이 아니겠는가?
소석 마을 앞에 흐르는 양산천 앞에 잔디밭과 나무들이 나란히 늘어서 있다. 누군가의 손길이 느껴질 정도로 잘 정리되어 있었다.
"우리는 거기를 소석 동산이라고 부르는데, 봄에 벚꽃나무에서 벚꽃이 피면 꼭 눈 오는 것처럼 보여서 참 좋답니다. 가을엔 단풍이 들어서 보기 좋습니다. 예전에는 거기서 경로 잔치도 하곤 했는데 지금은 면 자체에서 하기 때문에 없어졌지만 말이죠. 여름엔 타지에서 사람들이 많이들 놀려 온답니다. 앞에는 강이 흐르고 뒤에는 병풍처럼 산이 둘러 쌓여 있어 공기 좋고 물 좋은 마을이지요."
정계화 부녀회장과 마을 주민들은 `소석 동산`에 대해 침이 마르도록 자랑을 했다. 10여 년 전 마을 주민들이 잔디를 심고 나무를 심어 만들어서 인지 애착이 많은 듯 했다. 봄·여름으로 한 달에 한 번 꼴로 비료를 주고 마을 주민들이 직접 손질하여 가꾸고 있었다.
마을 주민 대부분이 윗대부터 대대로 살아서 인지 마을 주민들 모두 `형님 동생`하면서 정겹게 살고 있었다. 그래서 마을 앞 잔디도 관리가 잘 되고 있는 건지도 모를 일이다.
마을 주민 대부분은 농사를 짓고 있다. 여름에는 토마토를 한다고 했다. 그냥 한 눈에 보아도 소석 마을도 전형적인 자연 마을 형태를 띠고 있었다. 농사 위주로 생활하면서 공기 좋아 보이고 물 좋은 그리고 인심도 넉넉해 보이는 마을로 보였다. 평화롭게 흐르는 구름과 잘 어울리는 마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