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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산시민신문

송담서원(松潭書院)
사회

송담서원(松潭書院)

양산시민신문 기자 입력 2003/11/08 00:00 수정 2003.11.08 00:00
영남 유일의 사액 서원 대흥군때 철폐, 85년 중건

송담서원은 조선 선조대 충신 백수회(白受繪)를 모신 서원이다. 선생은 조선 선조ㆍ인조대(1574~1642년) 인물로 자는 여빈(汝彬)이며 본관은 부여이다.
 
선조 25년(1592년) 임진왜란 때, 선생이 19세의 나이로 산사에서 독서하다가 적에게 붙잡혀 일본으로 건너가 갖은 고초를 겪었다. 약관이 못된 몸으로 풍골이 준수하기 이를 데 없었으니 왜구는 선생을 장차 귀히 쓸 인물로 보고 반드시 항복을 받으려고 하였으나 끝내 훼절치 않고 팔위에 글을 쪼아 새겨 스스로 맹세하되 "이씨의 귀신이 될지언정 견양(犬羊)의 신하는 되지 않으리라"고 하였다.
 
이에 놈들이 흰 칼날과 끓는 가마물로 위협하였으나 선생은 오히려 얼굴에 웃음을 띠고 가마에 들어가려 하니 만추(蠻酋ㆍ오랑캐 두목)가 감탄하여 마침내 선생을 보호하기에 이른다.
 
그러던 끝에 9년만에 결백한 몸으로 돌아왔다. 때는 광해군의 폭정으로 조정의 기강이 문란하고 마침내 폐모(廢母)의 논(論)이 일어나기에 이르렀으니 선생이 이를 분히 여겨 통곡하여 이르기를 "천하에 어찌 모후(母后) 없는 나라가 있으리오. 윤기(倫紀)가 길을 잃었으니 어찌 인륜이 있다 하리오." 하며 날아 온 통문(通文)을 찢어 없애버리며 일갈했다. "내 몸소 화를 당할지언정 사람의 이목을 더럽힐 뿐인 이런 흉역지서(凶逆之書)를 받을 수 없노라."
 
인조반정이 일어난 뒤 사옹원(司饔院 ) 참봉(參奉)에 임명되었으나 사퇴하고 예빈사(禮賓寺) 참봉 뒤에 찰방(察訪)을 지냈다. 현종 11년(1670년)에 호조참의(戶曹)參議)에 추증(追贈)되었고 숙종 22년(1696년), 군수 조무훈(曺武勛)이 충렬사(忠烈祀)를 세워 배향하였다.
 
이후 그의 충후를 길이 새기고자 사람들이 널리 뜻을 모아 숙종 40년(1714년)에 서원(書院)을 세우고 숙종 43년(1717년)에 사액(賜額ㆍ임금이 사당, 서원, 누문 따위에 이름을 지어서 새긴 편액을 내리던 일)을 받았으니 이는 영남 유일의 사액서원이다. 선생의 호를 따서 송담서원(松潭書院)이라 하였다.
 
이후 대원군의 서원정리 때 철폐되어 빈터만 남았다가 최근 985년 가을에 중건되었다. 한편 숙종이 내린 치제문(致祭文)에는 선생이 일본에서 보여 준 의연한 기개와 광해군의 폭정 때 보여준 충절이 낱낱이 기록돼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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