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기나 물과 같은 것이죠."
별 시답잖을 듯한 물음에 실로 명쾌한 대답이다.
"가령 드라마 한편을 보더라도 거기에 음악이 없다면 얼마나 밋밋하겠어요."
그렇구나. 어디 드라마뿐이랴. 저 먼 원시시대를 거슬러 올라가지 않더라도 인간의 삶이 있는 곳에는 음악이 있어 왔고 음악과 더불어 인간의 삶이 이루어져 왔던 것을…
음악을 일러 `공기나 물과 같은 것`이라 정의하는 그는 누군가?
박우진- 알만한 이들은 다 아는 우리 고장 양산의 음악인이다.
보광고 음악교사이자 한국음악협회 양산지부 지부장인 그는 통도사합창단, 양산소년ㆍ소녀합창단, 양산교사합창단, 양산윈드오케스트라의 상임지휘자로 누구보다도 열심히 지역 음악의 텃밭을 일구고 있다.
그가 음악에 눈을 뜬 것은 언제일까?
"나의 음악 첫 걸음은 우리 소리, 즉 국악이었습니다. 할아버님이 고향 산청농악패의 뛰어난 상쇠였거든요. 그러니 어릴 때부터 자연스레 우리 소리에 귀가 틔었죠."
그의 할아버지는 한 때 영남농악을 휘어잡았던 어른. 농악하면 밀양농악을 쳐 주던 시절에 산청농악패를 이끌고 개천예술제에 참가, 보기 좋게 밀양농악패를 눌렀다. 그런 그의 할아버지가 새벽마다 아직 잠이 덜 깬 손주 머리맡에서 우리의 전통악기들을 매만지셨으니 그의 소리에 대한 감각이 어떠했으리라는 것은 능히 짐작이 간다.
그렇게 초등학교 때까지 북을 두드리고 꽹과리를 치면서 자란 소년 `우진`은 고향 산청에서 초등학교와 중학교를 마치고 고등학교는 대처인 진주로 나간다. 그런 그에게 집안의 어른들이 기대했던 것은 육군사관하교 진학이었다. 하긴 그때만 해도 군인들이 득세하던 시절이었으니 집안의 영특한 아이가 육사를 나와 별도 달고 장관이나 국회의원쯤으로 출세하기를 바랐음직하다.
-군인과 음악가? 너무 다른 분야인데…
"솔직히 점수가 좀 모자랐죠. 어른들의 실망이 컸습니다."
그렇게 말하면서 그는 멋쩍은 웃음을 짓는다. 그러나 그것이 오히려 잘된 일이 아닌가 싶다. 군인이야 다른 누군가가 하면 될 터이지만 하마터면 우리 음악계에 한 걸출한 인재를 잃을 뻔 했으니 이를 일러 전화위복(轉禍爲福)이라 할까?
사관학교 진학이 좌절된 그는 경희대 음악대학과 대학원을 거쳐 마침내 음악교사의 길로 들어선다. 그런데 아이들에게 음악과 삶을 가르치며 꿈을 심어주는 일이 한창 무르익어가던 어느 날, 그에게 새로운 세계로 뻗어나갈 수 있는 문이 열린다. 현직인 보광고에서 외국유학의 길을 터준 것이다.
"사립학교에서 현직교사를 휴직까지 시키고 유학을 갈 수 있도록 배려해 주는 것은 흔치 않은 일이죠."
그렇게 떠난 유학길. 이탈리아 로마 Arts Accademia, 이탈리아 뻬루지아 G. Frescobald 음악원 지휘과정, 이탈리아 Cagli시립 국제오페라 아카데미를 거쳐 다시 고국으로 돌아와 본래의 자리인 보광고 교단에 선다. 국내에서는 성악(베이스바리톤)만 공부했지만 이탈리아에서는 성악과 지휘자과정을 두루 섭렵했다.
이쯤에서 평소에 늘 지녀왔던 의문을 하나 털어놓아 본다.
-우리 음악교육에 문제가 있는 겁니까? 성악이든 기악이든 지휘자든 다들 밖에 나갔다 와야 제대로 행세를 하는 것 같으니…"
"우리 음악교육의 수준이 낮아서 그러는 건 아닙니다. 그곳의 정서와 분위기를 체득하려는 것이지요. 마치 한국의 판소리를 배우려면 한국에서 배워야 하는 이치와 같죠. 아무리 유능한 교수가 있는 서양의 우수한 음악학교라 하더라도 거기서 한국의 전통음악을 가르치는 데는 한계가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서양음악을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서양음악의 본고장에 가서 그곳 사람들과 부딪치면서 그곳의 문화를 경험해야 됩니다."
`옳거니! 그랬었구나, 그런 것을 모르고 공연히 우리 음악교육의 수준을 의심해왔으니…`
유학에서 돌아오자마자 그는 팔을 걷어붙이고 왕성한 음악활동을 펼쳐나간다. 학교에서는 여전히 아이들의 좋은 선생님으로, 학교 밖에서는 대중에게 다가가는 음악 전도사로…
이 무렵, 음협 양산지부가 창립되면서 지부장을 맡고 곧 이어 양산윈드오케스트라와 양산교사합창단이 만들어 진다. 그러면서 그는 자신이 꾸미는 프로그램의 컨셉(concept)을 장벽허물기와 대중적인 것으로 잡는다.
"음악가가 음악가 스스로의 만족감에만 도취해서는 안 됩니다. 청중이 없는 음악이 무슨 쓸모가 있겠습니까. 대중들이 음악의 다양한 장르를 체험할 수 있도록 해야죠."
그래서 그는 동ㆍ서양을 아우르고 클래식과 대중음악을 한 밥상에 올리는 무대를 곧잘 만든다. 이를 일러 `퓨전음악`이라 했던가. 우선 연주의 눈높이를 청중의 눈높이에 맞추고 차츰 청중의 눈높이를 끌어올리겠다는 전략인가 보다. 그리고 그는 음악연주장에서의 엄숙주의도 배척한다.
"지난여름, 함안의 어느 여중 강당에서의 윈드오케스트라 공연 때였습니다. 겨우 200명이 조금 더 들어올 수 있는 작은 공간에 청중들이 꽉 들어찼습니다. 자연히 공연장이 시끄럽고 소란스러울 수밖에 없었죠. 그런데 그 공연이 그렇게 즐겁고 신명날 수 없었어요. 어느 단원은 자기가 음악을 한 이래 이처럼 행복감을 맛본 적이 없다고 했어요."
`클래식을 하면서도 떠들 수가 있다니…` 그것은 음악을 하는 사람으로서도 일찍이 느껴보지 못한 색다른 경험이었던 것이다.
찾아가는 음악회- 이미 그렇게 해왔던 것처럼 그는 앞으로도 앉아서 청중들을 기다리지 않고 부지런히 청중들을 찾아 나설 참이다. 그러자면 35명의 교사합창단도 서너 개의 중창단으로 나누어 작은 무대를 위한 프로그램을 꾸며야 되겠단다.
그런 그이기에 오는 12월에 창단 예정인 시립예술단에도 남다른 관심을 지니고 있다.
"지역 예술인들을 홀대해서는 안 됩니다. 지역 예술단에 내 삼촌도 있고 시동생이나 친구도 있고 후배도 있어야 지역민들이 애정을 기울일 수 있지 생판 모르는 타 지역 사람들로 팀이 구성되면 지역민들의 관심을 불러낼 수 없습니다."
지역 예술인이라고 무턱대고 함량미달인 사람을 기용하라는 것이 아니라 양산에는 이미 상당한 실력을 갖춘 음악인들이 많으니까 그들로서도 충분히 시립예술단을 구성할 수 있다는 말이다. 인근 도시에서 타 지역 사람들로 예술단을 꾸며 실패한 사례들을 반면교사로 삼으라는 주문인 것 같다. 그렇겠다. 지역민들로부터 사랑과 관심을 받지 못하는 예술단이 무슨 의미가 있으랴. 이 일을 담당하는 관계자들이 허투로 들을 말이 아닐 듯싶다.
`아, 벌써 시간이 이리 되었나?` 나눌 이야기는 끝이 없는데 가을밤은 속절없이 깊어만 가니 못다 한 이야기는 다음 기회로 미룰 수밖에… 헤어져 떠나오는 발길이 못내 아쉽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