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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산시민신문

[교동마을) 조선시대 향교 건립, 유림들이 모여들던 학동(..
사회

[교동마을) 조선시대 향교 건립, 유림들이 모여들던 학동(學洞)

양산시민신문 기자 입력 2003/11/22 00:00 수정 2003.11.22 00:00
양산 최초의 근대적 교육기관이 세워졌던 곳

■위치와 환경
 
1983년 양산읍에 이속되기 이전 물금면의 중심지였던 교리 또는 교동(校洞)은 구한말 상서면시대에는 향교안 명륜당(明倫堂)에 면사무소가 설치되기도 (1896년)하였다.
 
교동의 북쪽으로 마고성(麻姑城)에서 이어지는 향교등(鄕校嶝)의 산자락에 양산향교가 자리잡고 있다. 또 향교 뒤쪽에서 동으로 뻗은 작은 등성은 마요등(馬腰嶝)으로서 춘추원을 감싸고 있다. 아래에는 유산, 어곡으로 가는 도로가 남북으로 통과하며, 또 양산천이 영대교(永大橋)를 지나 낙동강으로 흘러 들어간다. 남으로는 황새등이 동서로 뻗어 내려 양산천과 맞다은 자리에 협성아파트가 들어서 있다. 서쪽으로는 삼양화학공장 위에 화제고개가 있어 원동면 화제리와 접한다.
 
 
■마을의 내력
 
조선 초의 기록인<경상도속찬지리지>(1469년, 예종 원년)중 <도진(渡津)>에는 교리지역을 구읍포(仇邑浦)라 했고, 대천교(大川橋)가 있다고 기록되어 있다. 이를 미루어 볼 때, 이 지역은 신라시대부터 양산읍의 가장 가까운 위치에 있는 포구로서 양산읍민의 생활필수품 교환 장소로 이용되었을 것으로 추측된다.
 
또 조선 초 향교가 현 위치에 건립되자 유림들이 모여 들어 본격적인 학동(學洞)이 되었으리라는 것도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교동이라는 마을 이름도 향교가 위치한 곳이라는 뜻에서 유래하였다. 향교의 대성전(大成殿) 뒤에는 굴이 하나 있었는데 임진왜란 당시 향교의 문서를 감추었던 곳이라고 한다. 또 영대교 아래 물금으로 흘러가는 양산천 가에 조선말엽에 유목정(柳木亭)이란 주점이 있었으며 길가에는 많은 버드나무가 있어 여행객들의 휴식처로서 해방이후까지도 양산의 풍류객들이 즐겨 찾던 곳이었다 한다. 영대교가 가설되기 이전에는 짚으로 엮은 큰 가마니에 돌을 채워 석교(石橋)를 놓아 통행에 이용하였는데 잦은 비에 유실되었다. 이때 강가에서 사람을 업어 내를 건네주고는 품삯을 받는 것을 업으로 하던 사람이 있었는데 이를 일러 월천(越川)꾼이라고 불렀다 한다.
 
구한말인 1896년에는 정부의 행정구역개편에 따라 명륜당에 사립 원명학교(元明學校)가 들어섰는데, 이는 양산 최초의 근대적 교육기관이었다. 이후 1910년에는 원명학교가 폐지되고 양산공립보통학교가 설립되었다. 곧 교리는 양산지역 교육의 본고장이었고, 물금행정의 발상지였다. 이후 1922년 물금리로 면사무소가 이전되고 학교 또한 양산읍소재지로 옮겨간 이후 옛 위상이 다소 떨어지기는 하였으나, 1990년부터 창조, 협성 등의 아파트 단지가 들어서면서 인구가 급격히 증가하였다. 1978년 유산공단 설치 당시 행정구역상 법정리 교리는 교동, 회현동, 신주동, 양동의 4개 행정마을로 구성되어 있었다. 이때 양동은 유산공단으로 편입되고 그때의 가구 중 2가구가 남아 있다.
 
또 1983년 2월 15일 행정구역 개편으로 교리, 유산, 어곡은 물금면에서 양산읍으로 이속되었으며 신주동은 물금면 범어리로 편입되었다. 현재는 강서동으로 행정마을은 교동, 회현마을, 강변마을 등 3개 마을로 구성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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