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태종 6년(1406년)에 창건되었으며 임진왜란 때 불타서 1610년 무렵 다시 지었다. 1626년 중건하였고 1700년 읍의 서쪽으로 이전하였다가 1744년 읍의 동쪽 옛 터 부근으로 다시 옮겼다. 1864년 중수하였으나 1744년 재이건할 때의 외관과 큰 변화가 없는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1931년 풍영루를 중건하였고, 1936년에는 청원재를 중건하였으며, 1955년에는 명륜당을 중수하였다.
1970∼1971년 대성전과 명륜당을 비롯하여 풍영루(風詠樓) 등의 부속건물을 대대적으로 보수하였으며, 1986년에 대성전과 명륜당 등을 중건하면서 현재의 모습을 갖추게 되었다.
문루인 풍영루로 들어서면 명륜당은 평지, 대성전은 급경사지에 있다. 배치는 교육공간인 명륜당과 동재, 서재를 앞쪽에 두고 대성전 등의 제사 공간을 뒤로 둔 전학후묘(前學後廟)의 형식을 취하였다.
목조기와집으로 4채의 건물과 고직사(庫直舍)로 구성되어 있다. 풍영루는 정면 3칸, 측면 2칸의 중층누각(重層樓閣)으로 팔작지붕이고, 명륜당은 학생들이 모여 공부하는 강당으로 정면 5칸, 측면 2칸의 단층 팔작지붕집이다. 내삼문과 외삼문은 누 형태를 취하고 있으며 대성전은 공자를 비롯하여 여러 성현들의 위패를 모시고 제사 지내는 곳으로 정면 3칸, 측면 3칸의 익공식(翼工式) 단층 맞배지붕집이다. 이 향교는 조선시대에 국가로부터 토지와 전적ㆍ노비 등을 지급받아 교생을 가르쳤으나, 갑오개혁 이후 신학제 실시에 따라 교육적 기능은 없어지게 되었다.
갑오경장이후 향교 명륜당 일부에 상서면사무소를 설치하여 이용했고 1909년 신교육의 시대 요구에 따라 유림대표들이 원명학교(元明學敎)를 창립하기도 했다.
그 후 1911년 양산공립보통학교가 인가되어 잠시 향교를 사용하다가 양산으로 이전해가고 상서면사무소는 1921년 7월 물금 화학동(華鶴洞) 390-3번지로 이전해갔다. 해방 후 양산고등공민학교 및 기술학교로 사용되기도 했다.
현재 대성전에 5성(五聖)ㆍ공문10철(孔門十哲)ㆍ송조2현(宋朝二賢) 및 우리 나라 18현(十八賢)을 배향하고 있으며, 매년 음력 2월과 8월 상정일(上丁日)에 석전(釋奠)을 봉행하고 있다.
■옛 경로잔치, 기로연(耆老宴) 재현
한편 양산향교는 지난 10일 오전11시 향교 명륜당에서 기로연(耆老宴)을 재현했다.
기로연은 봄(음력 3월 상순의 사일 또는 3월 3일)과 가을(음력 9월 9일·중양절)에 정기적으로 국가에서 베푼 잔치로 1395년(태조 4년) 태조가 환갑이 돼 자신이 기로소(耆老所)에 들어가 원로 신하들에게 처음으로 기로연을 베푼 후 연례적으로 시행된 행사로 오늘날의 노인위안잔치의 성격을 지니고 있는 옛 풍속이다.
이 날 행사는 행사의 주인인 신희범 양산시장권한대행이 동문 밖에서 주빈을 영접해 행사장 안으로 모셔 오는 손님맞이 행사를 시작으로 주인과 내빈의 상견례, 전교가 참석한 내빈에게 인사하는 환영인사, 내빈들에게 집사가 나라 임금님이 하사한 술을 따르고 주인이 인사와 건배를 제의하며 국악을 연주하는 초 헌작(獻爵)에 이어 재 헌작, 삼 헌작, 상읍례, 향응의 순서로 옛 기로연 행사를 그대로 재현했다. 가을을 맞아 지역의 어른들을 위로하고, 예우하기 위한 이 행사는 비가 오는 가운데서도 지역의 77세 이상 유림 33명이 주빈(主賓)으로 참석해 의미를 더했다. 이와 함께 70세 이상 유림과 신희범 양산시장권한대행, 박일배 양산시의회의장을 비롯한 기관ㆍ단체장 등 60여명의 내빈이 참석해 풍성한 잔치마당을 이뤘다.
행사에 참여한 신희범 양산시장 권한대행은 "지역의 어르신들이 한 자리에 모여 담소하고 정을 나눌 수 있는 이런 자리를 자주 마련하도록 하겠다"고 축사를 했다.
신명난 가야금 병창 등 국악의 향연이 곁들여진 이날 행사는 모든 참석자들에게 온고지신의 이치를 일깨워 주는 뜻 깊은 자리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