웅상읍 매곡마을 끝자락, 하늘과 맞닿을 듯한 언덕배기에 마치 동화속의 궁전 같이 아담하고 예쁜 양옥이 서너 채 앉아 있다. 이름하여 -웅ㆍ상ㆍ아ㆍ트ㆍ센ㆍ타-
거기 아들 둘 거느리고 오누이처럼 살아가고 있는 중년의 부부가 있다하여 늦은 밤 비탈길을 오른다.
서양화와 조각을 하고 있는 남편 정철교, 한국화를 그리고 있는 아내 유남희.
번잡한 세속을 벗어나 어찌 이리 좋은 곳을 찾았을까?
"사람들 모여 사는 곳에서는 조각 작업이 쉽지 않습니다. 그리고 일정한 공간도 필요하고… 남에게 피해를 주지 않고 편하게 작업할 곳, 거기다 땅값도 싸야한다는 조건을 맞추다 보니 여기가 발견된 거죠."
`땅값도 싸야한다`는 대목에서 멋쩍게 웃는 남편 정철교 씨의 몸에서 마른 풀내음이 난다.
"처음에는 예술촌을 만들 생각이었죠. 그런데 여기가 워낙 외진데다 교통도 불편해 애초에는 동참할 생각을 가지고 있던 친구들이 다들 고개를 젓고 애써 동참시켰던 두 명도 곧 떠나버렸습니다."
아닌 게 아니라 차 한대가 겨우 다닐 비탈길이 꼬불꼬불하기가 여간 아니니 아무나 이런 곳에 삶의 둥지를 틀 요량을 못했으리라.
고등학교(부산 동래여고) 미술교사인 아내는 물론, 전업작가라 해도 바깥출입이 없지 않을 남편, 그리고 부산의 원예고와 예술중학을 다니는 아들들이 겪을 불편이 이만저만이 아니겠다 싶다.
"사소한 불편이야 있죠. 그렇지만 좋은 점이 훨씬 더 많아요." 아내 유남희 씨의 말이다.
아, 그렇구나. 이 아름다운 자연 속에서 맑은 공기 마시며 이녁들의 예술혼을 불태우고 사는 쏠쏠한 재미가 바깥나들이의 불편쯤이야 사소한 것으로 돌릴 수 있게 하는 게로구나. 덕계 아파트촌에서 2년, 여기서 8년, 이들 부부의 양산살이도 어느새 10년이 됐단다.
경북 감포에서 태어나 유년시절부터 부산에서 자란 정철교 씨는 고등학교 1학년 때, 비로소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고2때 처음 유화에 손을 댔는데 유화를 그린다는 사실이 얼마나 좋았던지 캔버스를 앞에 두고 감동하여 온몸에 전율이 느껴져 한동안 멍하니 앉아있었던 기억이 납니다. 고등학교를 다닐 동안 정말 열심히 그림을 그렸습니다."
그런 그는 아마도 타고난 화가였던가 보다. 고등학교 1, 2학년 때 영남의 각종 미술실기대회를 석권하고 3학년 때는 전국대회에서 최고상을 받으면서 마침내 그의 이름을 세상에 두루 알리게 된다. 그 무렵 고교생 정철교의 그림이 어느새 일반작가의 반열에 다다랐다는 기성화단의 평가가 있었고 그가 다니던 고등학교(동래고)의 교장선생님은 이 재기 넘치는 소년화가의 그림을 수월찮은 돈을 주고 매입하기에 이른다.
그러나 고교를 졸업한 그에게는 대학진학의 꿈을 접어야하는 좌절이 찾아온다. 이 아픔을 애오라지 그림을 그리고 싶다는 열망으로 이겨내면서 화실을 운영하고 각종 전시회에 출품을 하는 가운데 그는 어엿한 한 사람의 화가로서 자리를 굳혀간다. 그러다가 서른 한 살에 비로소 대학(부산사대 미술교육과)에 입학하고 내친 김에 대학원까지 마친다.
"대학에서는 조소를 했습니다. 그림은 나름대로 어느 정도 했다고 보고 전공을 조소로 했는데 말하자면 평면(그림)에서 입체(주각)로의 자연스런 이동이었던 셈이죠."
그는 지난 2월에 그가 처음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던 무렵의 작품들을 모아 [정철교 1971-1975 그림전]을 가진 바 있다. 당시의 열망과 관심이 고스란히 담겨있는 애송이 고교시절의 작품들은 그에게 있어서 그만큼 살갑고 값진 것.
그런데 남편 정철교와 아내 유남희의 만남은 어떻게 이루어 졌을까?
"고등학교 졸업하고 화실을 운영할 때였습니다. 어느 날 화실에 단발머리의 여고생이 찾아 왔습니다."
더 말이 이어지지 않아도 알겠다. 그들은 처음 그렇게 스승과 제자로 만났단다. 그러다 청년 정철교가 늦깎이 대학생이 되고 삼십대 중반이 되어서 대학을 졸업할 때까지 둘은 서로 아끼고 존중하다 마침내 서로의 반쪽이 되어 하나가 된다.
어려서 피아노를 했던 유남희 씨는 여고 2학년 때 청년 정철교의 화실을 찾은 것이 계기가 되어 그림에 눈을 뜨고 대학(부산여대ㆍ현 신라대 전신)에서 한국화를 전공하면서 본격적으로 화가의 길을 열어가게 된다. 그런 그에게 그림은 무엇일까?
"삶을 풍요롭게 하죠. 사람은 짐승이 아니기 때문에 등 따습고 배부른 것에만 만족해서는 안 되는 것 아니겠어요? 한 사회를 이끌어 가고 발전시키는 원동력도 미술에 있다고 봐요."
그렇게 말하는 그는 우리의 학교교육이 점차 예ㆍ체능을 홀대하는 쪽으로 기울고 있어 마음이 어둡단다.
정철교ㆍ유남희- 처음의 만남은 스승과 제자였으나 이제는 같은 예술의 길을 걷는 동반자가 되어 서로의 작품세계를 존중하고 받들면서 남편이 아내를, 아내가 남편을 닮아가고 있다.
"서양화가 캔버스 위에 물감을 얹어 자기의 생각을 표현하는 것이라면 한국화는 그 표현을 종이 속에 스며들게 하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스며든 것이 속에서 우러나오게 하는 것이죠. 이것이 곧 한국적 정서가 아니겠어요. 그래서 아내의 작품은 깊이가 있습니다."
아, 참 행복하겠다. 남편이 이리도 알아주는데 그 아내 어찌 복에 겹지 않으리.
유남희 씨는 집 근처 천지에 늘려있는 흙덩이나 풀잎, 나뭇잎에서 천연염료를 얻는다. 그러다 보니 자연의 색감에 반해 염색에도 아주 깊은 조예를 지니게 되었다. 아트샵에 들어서면 맨 먼저 눈을 반기는 것이 천연염료로 물을 들인 개량한복들이다.
바야흐로 계절은 겨울을 채근하고 있다. 더 추워지기 전에 여기 [웅상아트센타 / 아름다운 갤러리]에 들러 좋은 그림도 감상하고 보이차나 허브차 한잔 놓고 아트샵 창밖으로 겨울 채비하는 산속 정경도 살펴보는 것은 어떨까? 보일 듯 말 듯한 이들 부부의 부부사랑도 얼핏 훔쳐보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