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적 제95호. 양산시 중심부에 존재하는 여러 고분군 가운데 가장 남쪽에 있는 것으로, 중 ·소형의 고분 70여 기가 4만 3,230평 면적의 산기슭에 분포되어 있다. 모두 원형의 봉토가 있는 무덤이며, 대형은 지름이 30m, 높이 8m 가량 되는 것도 있으나, 많은 수가 봉토가 유실되어 형태만 겨우 남아 있다. 이 고분들의 대부분은 도굴ㆍ파괴되고, 학술조사가 이루어지지 않아 고분군의 성격을 정확히 파악하기는 어렵다. 다만, 파괴되거나 노출된 상태로 보아 앞트기식[橫口式] 돌방무덤[石室墳] 또는 돌덧널무덤[石槨墳]으로써 무덤의 양식상 삼국시대에서 통일신라에 걸쳐 조성된 것으로 보인다.
◀북부동 산성
사적 제98호. 양산시 중심부의 동쪽에 있는 동산(東山)의 정상부에 있으며, 멀리로는 낙동강이 바라보이는 곳에 있다. 지금은 성곽의 대부분이 붕괴되어 초석만이 남아 있으나, 성곽의 남동부에는 3m가 넘는 견고한 석축이 곳곳에 남아 있는 등 전체적인 축성방법이 명곡천(明谷川)을 사이에 두고 약 2km 떨어져 있는 신기리산성(新基里山城)과 유사하다. 따라서 신라시대에 낙동강 하구를 통해 침입해 들어오는 왜구를 막기 위해 삽량주에 수차에 걸쳐서 성을 쌓았다는《삼국사기》의 기사와 관련하여 이 성이 그 중의 하나였다고 짐작된다.
◀삼강행실도
목판본, 3권 1책이다. 1431년(세종 13)에 집현전(集賢殿) 부제학(副提學) 설순(循) 등이 왕명에 따라 조선과 중국의 서적에서 군신(君臣)ㆍ부자(父子)ㆍ부부(夫婦) 등 3강(三綱)의 모범이 될 만한 충신ㆍ효자ㆍ열녀를 각각 35명씩 모두 105명을 뽑아 그 행적을 그림과 글로 칭송한 책이다. 이 책은 1481년(성종 12)에 한글로 번역되어 간행되었고, 이어 1511년(중종 6)과 1516년, 1554년(명종 9), 1606년(선조 39), 1729년(영조 5)에 각각 중간되어 도덕서로 활용되었다.
이밖에도 고려 우왕(禑王) 때 진사를 지낸 박창(朴暢)과 이공미(李公美)를 기리기 위해 주민들이 세운 것이라고 전해지고 있는 ◀효자리비(경상남도유형문화재 제148호), 1600년(선조 33), 국왕이 무과에 급제한 안건과 안재명 두 사람에게 내린 ◀무과교지(경상남도유형문화재 제149호), 1594년(선조 27) 임란 때 공을 세운 향교의 교생 안제가 군자감(軍資監)의 참봉(參奉)으로 제수되면서 받은 무관임명장인 ◀무관고신교지(경상남도유형문화재 제150호), 17세기 중엽 숙종 초기의 것으로 추정되는 ◀양산토지명기대장(경상남도유형문화재 제151호)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