며칠 쌀쌀하던 날씨가 제법 겨울답더니 모처럼 포근하게 풀린 12월 초순의 화요일 오후.
한가한 시간이려니 싶었는데 웬걸? 짬짬이 이어지는 결재서류에 쉴 새 없이 걸려오는 전화로 얘기를 잇기가 만만찮다.
크든 작든 한 조직의 머리가 된다는 일이 그리 쉬운 일은 아닌가 보다.
쉰일곱. 하마 예순 고개가 저만치 보이겠다.
본향은 경남의 고성이라지만 대학은 경기대(국어국문학과)를 나오고 졸업 후에는 곧장 양산으로 내려와 교직생활을 시작했으니 고향 떠난 세월이 아득하겠다.
1970년 3월 1일자로 양산여중에 부임해 평교사에서 교장에 이르기까지 한곳에서만 33년의 세월을 보낸 진득함이 놀랍다. 더불어 고성사람 김보안의 양산살이도 그만큼이나 되니 이제 양산사람이 다 되었겠다 싶다.
시조시인 김보안, 그에게 문학은 무엇일까?
"영혼 달래기!"
영혼 달래기? 뜨악해 있는데 곧 다음 말이 이어진다.
"문학을 통해 되돌아보며 반성하는 삶을 살게 되지요."
그렇구나. 문학이 삶을 되돌아보는 도구로도 쓰이는 구나.
어린 때 한 때, 누구나 문학에 대한 막연한 꿈을 가지듯이 그도 그렇게 어린시절 어슴푸레 문학을 꿈꾸었었단다. 다행이 글 쓰는 남다른 총기가 있어 대학을 국문과로 택하고 자연스러운 수순으로 문학의 길에 들어선다. 그러나 문단으로의 등단은 대학을 졸업하고도 한참 뒤에나 이루게 된다. 하기야 문학에 있어 등단이라는 과정이 무슨 그리 큰 대수이랴. 다만 시를 쓰면 시인이요, 소설을 쓰면 소설가이겠거늘…
그래도 1990년. `현대시조`에 시조 `대숲`이 당선되면서 비로소 시조시인 김보완의 문학활동이 본격적으로 펼쳐진 것으로 보아 등단이라는 과정을 마냥 허투로 볼 일만은 아닌가 보다.
90년, 양산지역의 문학인구 저변확대와 향토문화를 폭넓게 수용하며 발전시키자는 취지로 의기투합한 일단의 문인들이 양산을 뜨겁게 달군다.
저마다 개인 활동을 하던 이들과 `글뫼`와 `용마름`의 동인활동을 하던 이들이 한 멍석위에 앉으면서 `글뫼`와 `용마름`을 발전적으로 해체시키고 마침내 `양산문학회`로 통합한다.
그 뒤 93년 10월에 사단법인 한국문인협회 양산지부가 창립되고 일년 뒤인 94년 10월에 양산문인들의 발표공간인 `양산문학`이 창간되는데 이 모든 과정의 중심에 섰던 인물이 바로 시조시인 김보안이었던 것이다.
연간인 `양산문학`은 지난해까지 제7집을 내고 지금 한창 8집 준비에 바쁘다. 이가 빠지지 않았더라면 올해로 10호가 나와야 했겠지만 이가 빠진 만큼 아픔도 적잖았으리라.
그런데 그는 왜 하필이면 문학의 여러 장르 중에서 유독 시조를 택했을까?
"압축미!" 역시 선명한 대답이다.
"한국인의 정서에 가장 어울리는 형식이잖아요?"
그렇다 싶다. 아는 바와 같이 시조는 고려중엽에 발생하여 고려말에 그 형태가 완성된 우리 민족 고유의 시장르이며 세계에 자랑할만한 유서 깊은 우리의 유일한 전통 문학이 아닌가.
시조는 처음에 양반계층의 노래로 출발했으나 조선시대에 이르러 위로는 임금에서부터 아래로는 기생에 이르기까지 모든 국민이 즐겨 부른 `국민문학`이라 할 것이다.
이 시조의 `시`가 `詩`가 아니라 `時`인 것으로 보더라도 그때그때의 흥에 겨워 일상생활에서 말하듯 자연스럽게 저절로 읊어졌던 문학양식일 터이니 김보안, 이 이가 시조시인이 된 까닭도 그런 예스런 우리 정서와 무관치 않겠다.
여기서 시조시인 김보안의 시조 한 수를 감상해 보자.
- 빗물은 강이 되고 -
한바탕 춤사위에 숨소리 굵은 대지
환정한 불면의 숨 출렁이는 잔을 들며
당신이
오는 이유를
젖을수록 압니다.
구성진 가락이며 신명나는 춤이다가
올 때부터 갈 곳 알아 슬픈 이별 숨기지만
일상의 때 묻은 사연
감아내는 울음이다.
무뎌진 몸부림도 돌아보면 바쁜 나날
피멍든 거친 영혼 하심으로 풀어놓고
물고기
비늘로 우는
울음 몇 점 듣고 간다.
어느새 바깥은 어둠살이 낀다. "재개발 공수표 같은 바람이 휘날린다"고 노래한 시조시인 김보안 교장의 시조 [산번지]를 가만히 읊조려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