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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산시민신문

[특집] 월하 대종사 발자취
가고 머묾을 논하지 말라..
사회

[특집] 월하 대종사 발자취
가고 머묾을 논하지 말라
곳곳이 나의 집이니라

양산시민신문 기자 입력 2003/12/13 00:00 수정 2003.12.13 00:00
대종사의 얼굴에는 번뇌의 어둠이 숨어있지 않았다.
늘 시골 할아버지 같은 지극한 자비심을 띄고 있어
보는 이들의 가슴에 잔잔한 감동이 일게 했다.

노천 월하 대종사(老天 月下 大宗師)는 1915年 4月 25日 충남 부여군 군수리 파평 윤씨 집안에서 태어났다. 老天은 법호(法號)이고 법명(法名)이 月下다. 속명(俗名)은 희중(喜重). 어릴 때부터 지혜와 자비가 몸에 익기 시작하여 출격대장부(出格大丈夫)로서의 자질을 보이다가 마침내 1933년 7월 20일 금강산 유점사로 출가하여 차성환 화상을 계사로 첫 사미계(沙彌戒)를 받고 운수의 삶을 시작하였다.
 
어릴 적 고향 부여 집 근처의 고란사란 절에서 스님들을 보면서 스님들의 생활이 퍽 고상해 보이는데다가 '아무나 이런데 와서 사는 것도 아니고 어째서 이런데 와서 사는가?'라는 의문을 품고 18살에 '나도 절에 가서 절 생활을 해봐야 되겠다'고 결심한 것이 출가의 계기였다고 한다. 이 때 속가 부모님이 올라와 세 번이나 끌려가는 경험을 했지만 끝내 출가의 결심을 막지는 못했다.
 
1940년 통도사에서 비구계(比丘戒)를 받고 당대의 고승 구하대선사(九河大禪師)를 만나 그의 수제자가 되었다.
 
대종사의 수행방법은 일정한 교리 연구를 다 마치고 전적으로 선(禪) 수행에 들어가는 것을 이르는 사교입선(捨敎入禪)의 절차를 밟지 않고 처음부터 바로 대승의 깊고 묘한 교리를 듣고 단번에 깨닫는 것을 일컫는 돈오(頓悟)의 경지에 이르렀다.
 
대종사는 1940년 오대산 방한암선사 회중에서 몇 차례의 안거를 성만(盛滿)한 후 1944년 철원 심원사에서 대교과(大敎科)를 수료하였다.
 
스님은 58년부터 80년까지 통도사 금강계단 전계대화상((傳戒大和尙)으로 승니(僧尼ㆍ비구와 비구니를 아울러 이르는 말)를 배출해내며 종단의 종장(宗匠)을 키워내는데 힘을 보태 60여명의 수법제자와 손상좌 등 2백여 명의 스님을 길러내 승가교육의 거목으로, 통도사의 산증인으로 자리매김했다.
 
스님은 이밖에도 중앙종회의원(55년), 통도사 주지(56년), 중앙종회의장(60년), 동국대학교 이사장(75년)을 역임했고 조계종 원로의원(78년) 및 총무원장(79년), 종정(94년) 등 종단의 주요 보직을 두루 거치며 조계종단의 정통성과 법통계승에 혼신의 노력을 다 기울였다.
 
84년 영축총림으로 지정된 통도사의 초대 방장으로 추대되면서 불교종찰의 수장이 되었으며 1994년 종단개혁 때 개혁회의 의장을 맡기도 했다. 2001년 영축총림 방장으로 재추대되어 입적하는 그날까지 단 한번도 구도자의 길에서 어긋나는 것을 스스로 용납하지 않았다. 어려운 현안이 있을 때마다 이사원융(理事圓融)으로 앞장서서 해결했다. 1954년 효봉, 청담, 인곡, 경산스님 등과 함께 '사찰정화수습대책위원회'에 참가해 전국사찰이 구도도장으로 제 기능을 할 수 있도록 불교정화운동을 전개하여 오늘의 조계종단이 자리 잡는데 산파역할을 했다. 이후 스님은 종단이 어려울 때마다 법등(法燈)의 역할을 자임했고 혜등(慧燈)의 맥을 잇는데 기여했다. 특히 종정(宗正) 당시인 98년 월주스님의 총무원장 3선반대 등 일명 '조계종 사태'로 조계종 종정과 영축총림 방장에서 물러나기도 했다. 스님은 당시 '종도들에게 드리는 글'을 통해 "98년 종단사태의 모든 책임은 내게 있다"는 뜻을 표명, 남을 탓하지 않고 모든 것을 자기의 잘못으로 돌렸다. 이런 일이 있고 난후에 2001년 영축총림 방장으로 재추대되기도 했다.
 
대종사는 80이 넘은 노구에도 손수 자신의 방청소와 빨래를 하며 새벽 3시 반 예불참여는 물론, 대중과 더불어 공양을 하였고 경내청소 등 운력(運力)에도 빠지지 않는 자오자증(自悟自證)하는 모범을 보였다. 또 항상 근엄하였으나 쓸모없는 권위를 버리고 노유와 어울리는 친화력을 가진 분이 바로 스님이었다. 오늘날 불지종가(佛之宗家)인 통도사의 가풍은 구하, 경봉, 벽안스님에 의해 이어져 다시 월하스님이 이를 전수받아 오늘에 이른 것이다.
 
대종사의 얼굴에는 번뇌의 어둠이 숨어있지 않았다. 늘 시골 할아버지 같은 지극한 자비심을 띄고 있어 보는 이들의 가슴에 잔잔한 감동이 일게 했다.
 
통도사가 오늘날의 당우를 건립하여 위용을 자랑하고 있는 것도 선사의 도움 덕분이 컸다 아니할 수 없다.
 
대종사는 2003년, 불기 2547년 12월 4일 09시 15분 영축총림 정변전에서 입적, 머나먼 연화세계로 떠나기에 앞서 다음과 같은 임종게(臨終偈)를 남겼다.

一物脫根塵
한 물건이 이 육신을 벗어나니
頭頭顯法身
두두물물이 법신을 나투네
莫論去與住
가고 머묾을 논하지 말라
處處盡吾家
곳곳이 나의 집이니라

자료제공 - 통도사 -
정리 - 전영준 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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