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풀이를 하는 중인기라."
'자풀이?' 알고 봤더니 동석한 한 노인 분에게 이름 대신에 자(字)를 지어주고 그 뜻풀이를 하고 있는 중이란다.
'아하, 알겠다' 예전에는 이름을 소중히 여겨 함부로 부르지 않았던 관습이 있어 흔히 장가든 뒤에 본이름 대신으로 자(字)를 지어 불렀다 했지. 이를테면 공자의 이름은 구(丘)이고 자는 중니(中尼)라 했던 것처럼…
"어른의 이름을 함부로 부를 수 있나? 이 영감의 이름이 김일붕인데 어른도 '일붕이' 아이도 '일붕이'하면 안 되는 거지. 그래서 오늘 이 영감의 자를 지었는 기라. 어질 양(良)에 소나무 송(松)자, '良松'이라고 지었지" 동면노인회 회장인 이복우(77세) 옹이 귀띔해 준다.
친구들로부터 '良松'이라는 자를 받은 김일붕어른은 태생이 옛 언양읍의 상북면 양덕마을인데 고향마을 양덕의 '양'자와 지금 살고 있는 내송의 '송'자를 따 '양송'이라 지었다 한다.
"인자 서로 '하게'하는 사이에는 그냥 '이보게, 양송'하고 부르면 되고 마을 젊은이들은 '양송 어른'이라고 부르면 되는 기라."
동면노인회 이 회장, 내송마을 노인회장 황보 익(77세) 옹, 총무 김재환(66세) 옹 등, 마을 어르신 예닐곱 분이 한데 어울려 소주잔 기울이며 예스런 멋을 즐기는 품새가 아름답기 그지없다. 어르신들이 희미한 기억을 더듬어가며 마을의 유래와 유적들을 소개해 준다
■위치와 환경
내송은 동면의 중심부에 위치한 면소재지 마을로 금정산과 가모산의 정기를 받은 곳일 뿐 아니라 맑은 물과 청정한 공기가 머무는 자연이 살아 있는 곳으로 유명한 곳이다. 특히 가모산에서 흘러내리는 산지골은 옛날부터 폭포와 골짜기 등으로 경치가 빼어나 선비들의 여름철 피서지로 유명하였다 한다. 지금도 그 당시 선비들이 삼삼오오 모여 시를 읊으며 세상을 이야기 했던 '오수정(午睡亭)'이라는 정자의 흔적이 그대로 있다. 이 마을은 예부터 미곡생산(벼농사)을 주 산업으로 했으며, 조선시대에는 '앙골'이라는 곳에 '동사창(東社倉)'이라는 창고를 지어 미곡 등 곡식을 보관하기도 했다 한다. 최근에는 당근, 채소 등이 이 마을의 특산물로 생산되고 있다. 일부 농가는 축산, 낙농업 또는 밤, 배나무 단지 조성으로 생겨나는 과일 출하 등으로 고소득을 많이 올리고 있다. 일부 주거지를 제외한 전지역이 개발제한지역으로 묶여있다.
■마을의 유래, 변천 및 성촌
내송마을은 예로부터 마을 주변 곳곳에 아름드리 소나무가 많고 놀기 좋은 정자가 군데군데 있어 '송정(松亭)골'이라 불렀다. 1914년 행정구역 개편 때 송정골 안에 있는 마을이라 하여 '내송(內松)'이라고 이름 붙였다 한다. 성촌시기는 1500년대로 알려지고 있다. 약 450년 전 평해 黃씨, 인동 張씨가 정착하여 마을을 형성했고, 그 후 경주 李씨, 김해 金씨, 순흥 安씨, 함안 趙씨, 달성 徐씨 등이 입촌해 살아왔으며 지금은 많은 성씨가 모여 마을을 이루고 있다.
■문화재
◁정전봉(停戰峯)
이 마을에서 '정전방우' 또는 '전지뱅이'로 불려지고 있는 '정전봉'은 임란 때 왜군들이 동래포를 통해 쳐들어 올 때, 들판에서 일을 하던 황장사가 농우(農牛)를 버린 채, 쟁기를 메고 지금의 양산시 경계선 암벽 뒤에 숨어 왜군이 돌아 나오는 쪽쪽 20m 아래 송정천(松亭川)에 던져 버렸다 함. 그때, 혼비백산한 왜장이 군사들에게 '앞으로 진군하되 지명이 송정곡(松亭谷)이라 하거든 무조건 멀리 돌아가라'는 명령을 내렸다고 전해지고 있다. 내송 서북쪽 길가에 있었는데 길을 넓히면서 다 깨트려져 지금은 그 모습을 찾을 길 없다.
◁헐왕대(歇王臺)
가야국의 왕이 거동하다가 잠시 머물렀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 歇자는 쉴 헐자. 마을에서 서쪽 500m 지점의 들판에 있는 바위.
◁동사창(東社倉)
세금으로 받은 쌀을 보관하던 창고로 흔히 東倉으로 불리는 양산 곡창(穀倉)의 하나. 마을 '앙끌'에 있었다고 한다.
◁정진암(停陣岩)
마을에서 서쪽으로 1㎞ 떨어진 지점, 현재의 다방동과 경계하는 곳으로 임란 때 명나라 장수인 마귀(麻貴)가 이곳에서 왜군과 싸워 이김으로써 왜군의 진격이 멈췄다고 한다.
◁오수정(午睡亭)
마을에서 동쪽 계곡을 따라 약 1㎞올라가면 넓은 반석위로 맑은 물이 흐르고 그 위쪽 200m지점에 폭포가 있는 산수가 수려한 곳을 산자골이라 한다. 여기에 선조들이 정자를 지어 쉬면서 산수를 즐겼다고 전해 내려오고 있는데 그 정자를 午睡亭이라 부른다. 그 당시 바위에 새긴 午睡亭이란 글자가 아직도 남아있다.
◁양지재(養之齋)
경주 李씨들의 재실로 1993년 3월에 준공, 선조의 유덕을 받들고 후손에게 숭조정신(崇祖精神)을 심어주기 위한 도장으로 이용되고 있으며 해마다 가을철에 시제를 올리고 있음.
◁영모재(永慕齋)
경주 金씨 48대손 김재복(金在福ㆍ종이품))공을 모신 재실. 매년 제향을 올린다.
◁양유하 공 불망비(梁有夏 公 不忘碑)
1731~1732년(영조 7~8년)에 큰 가뭄으로 흉년이 들었으나 조정의 예산부족으로 진휼청(賑恤廳ㆍ흉년이 들었을 때에 백성을 구제하기 위하여 설치한 조선시대의 관아)에서 구제가 어려워지자 국가의 기강이 문란해지면서 각처에 도적이 성행하였다. 이때 특히 양산과 동래가 타 지방에 비해 그 피해가 다섯 배나 많아 어려움에 처하자 양유하 공이 가산을 털어 양곡을 싣고 와 기아민을 구제하고 중(僧)들을 불러 모아 굶어 죽은 자의 시신을 묻어주고 혼백을 불러 제사를 지내 주었다. 공의 이러한 은혜를 길이 새겨 전하고자 1735년(영조 11년) 겨울에 양산과 동래에서 불망비를 세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