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단 소각장에서 일어나는 매연과 분진이 모두 이 골짜기로 올라옵니다. 마을 뒤에 산이 가로 막고 있으니 매연과 분진이 빠져나갈 길이 없어요. 그동안 시에 몇 차례나 건의도 해 보고 공단 측에도 시정을 요구했지만 마이동풍입니다. 도리가 없는 일이죠. 이 작은 마을에서 아무리 용을 써봤자 힘이 있어야지요.”
오랜 선대부터 뿌리를 내리고 살아온 이 마을 토박이라는 마을 통장 류세열 씨의 푸념이다. 그렇기도 하겠다. 바로 마을 코앞에까지 공장들이 치고 올라와 있으니 어찌 그렇지 않으랴.
“어차피 조성되어 있는 공단에서 매연이나 분진이 안 나기를 바랄 수는 없는 일이지요. 그래서 이럴 바에야 차라리 마을 전체를 이주시켜 달라는 것이 우리 마을 주민들의 요구사항입니다.” 오죽하면 조상대대로 살아온 땅을 떠나겠다는 생각까지 했겠느냐 싶다.
개발의 삽질에 역사의 흔적은 사위어 가고 있지만 그래도 산막마을에는 오랜 세월, 이 마을 주민들의 입에서 입으로 전해져 오고 있는 사랑의 이야기가 있다.
마을 남쪽 산등성이를 넘으면 원효대사가 수도했다는 반고굴이 있으니 이곳이 곧 사랑 이야기의 근원이다. 옛날 원효대사를 찾아 이 마을까지 찾아온 한 여인이 있었는데 그 여인은 다름 아닌 요석공주. 이처럼 귀한 신분의 공주가 중을 찾아 머나먼 산골까지 온데는 그만한 깊은 사연이 있었으려니…
원효는 다른 스님들과 달리 불교를 대중화 하는데 힘쓴 승려다. 그러나 이러한 원효의 태도를 다른 스님들은 방탕한 것으로 오해하고 원효를 비난했다. 그러나 원효의 재능을 누구도 따를 사람이 없었으니 원효의 명성은 나날이 높아가고 마침내 요석공주가 그를 사모하게 되었다. 원효는 오직 불도를 닦고 중생들을 보살피는 데만 전력했을 뿐 요석공주의 애타는 구애를 듣지도 않았다.
그러던 어느 날 원효가 다리를 건너는데 어떤 사람이 무례하게도 원효를 다리 아래로 밀어 넣어 옷을 젖게 한 다음 요석공주가 있는 방으로 데리고 가서 옷을 말려 입고 쉬어가게 하였다. 그 날 밤의 인연으로 생긴 아이가 바로 뒷날 신라의 위대한 학자였던 설총이었다. 원효는 요석공주와의 인연을 맺은 다음날 홀연히 궁을 빠져나와 수도와 진리탐구에 더욱 매진하기 위해 이곳 반고굴에 왔던 것이다.
원효가 떠난 뒤 날마다 원효의 소식을 기다리다 애가 탄 요석공주는 원효를 만나기 위해 설총을 안고 여기까지 와서 산에 막을 치고 지냈다 한다. 그런 일이 있고 난 후 사람들은 요석공주가 산에 막을 치고 지냈다고 하여 마을 이름을 산막이라 불렀다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