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승도예가 단지 옛 것의 모방과 재현에만 그친다면 그것은 예술이라 할 수 없습니다. 하긴 지나친 상업주의로 흐르는 것도 경계할 일입니다만…”
그의 말에 따르자면 전승도예는 우리 조상들을 통해 오늘날에 전해 내려오는 전승기법을 발판으로 하여 새로운 도예 체계를 구축하는 것을 이르는 것이겠다.
그래, 그렇다면 그것은 또 다른 뜻에서의 창조이겠거늘…
“지금의 사기장 중에는 자기 작품을 ‘물건’이라고 부르는 작가가 더러 있습니다. 그런 사기장들은 사기장으로서의 자부심이 없다고 말할 수 있죠. 물론 자만심을 가지라는 말은 아닙니다. 그러나 자부심 없이 도자기 작업에 임할 때는 명품을 만들기가 힘듭니다. 또한 자부심 없는 사기장의 행태는 일부 사람들에게 전승도예를 기능으로만 보이게끔 합니다.”
사기장? 도공이라는 말은 들어보았어도 사기장은 다소 생경하다.
“도공(陶工)이라는 말은 원래 일본사람들이 쓰던 말입니다. 우리말로는 사기장(沙器匠)이 옳은 말이죠. 잘못 쓰이던 도공을 사기장으로 바로잡는데도 꽤 많은 세월이 흘렀습니다.”
일본사람들이 쓰던 도공이라는 말은 단순히 그릇을 만들기만 하는 기능공을 이르는 말인데 도자기에 대한 연구와 이론이 겸비된 사람은 도사라고 불렀다고 한다.
그러니 도예가(陶藝家)라는 말도 아무에게나 붙이는 것이 아니라 도공으로서의 기능과 도사로서의 식견을 두루 갖춘 이에게 비로소 붙여줄 수 있는 이름이란다.
"도자기는 손가락으로 만드는 것이 아니라 마음으로 만듭니다."
손가락으로 만드는 것은 조금만 기능을 익히면 누구나 할 수 있는 일이지만 마음으로 도자기를 만드는 일은 누구나 쉽게 할 수 없는 일이려니 싶다.
“흔히 물레 앞에만 앉아 있어도 도예가라고 하는데 원래 도자기를 만드는 데는 각각의 분야가 따로 있습니다. 가마에 불을 떼는 '불대장' 그림을 그려 넣는 '환쟁이' 성형(成形ㆍ그릇의 형체를 만드는 일)을 하는 ‘대장’ 유약을 바르는 ‘생질꾼’이 있어 각 분야에서 적게는 몇 년, 많게는 몇 십 년을 그 일만 합니다. 이 모든 것을 다 아우르는 사람을 ‘변수’라고 하는데 ‘변수’가 곧 ‘도예가’인 셈입니다. 말하자면 ‘변수’는 오케스트라의 지휘자와 같은 존재라고 할 수 있겠죠.”
말만 들어도 숨이 막힌다. 예술의 어느 분야라고 쉽게 일가를 이루는 길이 있겠느냐만, 도자예술의 한 경지에 이르는 길이 이리도 멀고 힘겨워서야…
도예가 신한균에게 ‘언제 어찌하여 도예의 길에 들어섰느냐’고 묻는 것은 부질없는 질문이다. 그가 세상에 태어난 그날이 곧 도예입문의 날이라고 해도 지나친 말이 아니다.
신정희 선생-일제 강점 말기에 출생해 전쟁의 혼동기를 거치면서도 애오라지 사발에만 매달려 국내 도예계의 일인자의 자리에 오른 신정희 선생이 바로 그의 부친인 것이다. 선생은 국내에서의 명성은 말할 것도 없고 일본의 중앙방송과 황실에서 이도다완의 재현작가로 인정하는 그릇 세계의 실로 큰 그릇이다. 가족보다도 도자기가 더 우선이었던 그 아버지 밑에서 어린 시절 눈만 뜨면 옆에 있던 사금파리들이 지겨웠다는 그는 철이 들면서 아버지가 얼마나 훌륭한 분이신지 깨달았다. 이 외곬의 도예가 한사람의 지순한 열정은 마침내 이녁의 네 아들들을 모두 도예가로 만들었다.
그가 대학과 대학원(연세대학교 경영대학원)에서 경영학을 전공했고 졸업 후 대학강단에 서기도 했던 것은 외도가 아니다.
단순한 기능인이 아닌, 마음으로 그릇을 빚고 거기에 혼과 얼을 담는 도예가가 되기 위해서는 드넓은 세상에 나가 생각의 깊이를 더하고 삶의 지평을 한껏 넓혀야 할 필요가 있었던 것이다. 그래서 세계 각국의 도자기를 섭렵하기 위해 바깥나들이도 수월찮게 했다.
특히 일본에서의 활약은 눈부시다. 1989년부터 일본 동경동급미술화랑(東京東急美術畵廊)에서 도예 개인전을 매년 개최하고 있고, 89년부터 지난해까지 해마다 일본 공영방송 NHK 초대전, 매일방송 초대전을 <신정희ㆍ신한균 부자전>으로 가졌는데 이들 초대전은 일본 각 지역의 최고 화랑에서 모든 비용을 부담한 조건이었다고.
1990년부터 한국 사발에 관한 연구를 시작하면서 일본에 건너 가 일본의 국보가 된 진주사발(井戶茶碗)을 살펴보고 우리 옛 조상들의 숨결이 어려 있는 우리 사발들을 일본 박물관 진열장 안에서 꺼내 직접 손으로 만져 보는 등 2003년 현재 일본에 있는 우리 사발 명품 125점을 확인하는 활동을 펼쳤다.
1993년에는 한국공예대전 ‘동상’을 수상하고 1996년에는 함경도 회령유약을 국내 최초로 재현하는 개가를 올렸다. 그러는 과정에 2001년 일본 NHK에서 신한균 작도(作陶)과정을 일본전역에 생중계하기도 했다.
그는 지난해부터 ‘한국 사발이야기’를 집필 중인데 이는 일본 도예계의 요청에 따라 일본어로도 번역될 것이란다.
"전승도예는 한국인의 마음으로 만들어지고 한국인의 정서를 가득 담은 예술이기에 전승도예의 내면에는 한국인의 얼이 스며져 있고 보이지 않는 따뜻한 숨결이 있습니다. 그리고 그러한 숨결과 얼은 전승도예의 앞날에 끊이지 않고 흘러가야 할 것입니다.”
단지 보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쓰여 지는 도자기를 만드는 것이 도예가 신한균의 도자기에 대한 철학이다. 그러므로 생활 속에서 가까이 두고 사용하면서 사용자가 그 도자기의 참맛을 느끼고 거기에 가치를 부여할 수 있는 도자기를 만드는 것이 그가 스스로에게 부여한 과제이기도 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