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안하다. 그렇다고 일부러 져줄 수는 없잖아."
작은놈이 다섯 점 깔아놓고 둔 바둑에서 세 판을 연달아 지자 화를 낸다. 괜한 억지다.
"그러니까 아빠는 출세하긴 틀렸어. 설날 할머니하고 화투 칠 때도 할머니 몰래 잃어줄 줄도 모르잖아. 아빠랑 이제 바둑 안 둘래."
세상에! 어린 녀석이 못하는 말이 없다. 왜 엄한 할머니까지 끌어들인단 말인가.
"어째 한 판 눈치 못 채게 져줄 줄도 몰라. 남자는 늙어도 애라니까!"
아내까지 거든다.
그렇다. 작은 녀석 말이나 아내 말이 백 번 옳다. 표시 안 나게 져줄 줄도 알아야 한다는 것 마음으로야 다 알지만 막상 판 벌려놓고 보면 악착같이 이기고 만다. 마음으로 아는 것과 몸으로, 실천으로 아는 것 사이에는 엄청난 거리가 있다.
할머니(81세, 회복기 환자)와 / 나(35세, 현직 교사) / 마주 앉은 우리는 / 지금 진지한 중이다. // 先을 쥔 할머니와 / 맞손을 쥔 나의 두 장은 / 아무래도 거북한 형세인데 // 일점에 이십원 하는 / 화투판을 / 할머니와 나는 / 점심 내내 열중이다. // 할머니의 불면과 고혈압과 당뇨가 / 나의 독서와 목차와 원고의 근심이 / 오점 내기 화투판에서 / 사그라지고, 오직 철저한 대국만이 남은 때 // 아등바등 따져서 은근슬쩍 져 주는 妙 / 애정의 고수가 아니라면 감히 못할 法 / 그럴수록 계산은 확실히 할 일이다. // 낙장불입 점입가경 오호 통재라! // 단풍은 불긋불긋 / 공산명월은 화들짝 뜨고 / 난초는 고스란히 향기롭다.
배정희 <對局>
조손(祖孫) 간의 화투판 모습이 눈에 선하다. 따뜻하기가 발아래서 봄풀 냄새가 향그런 봄날 양지바른 언덕에서 해바라기하는 것 같다. 배정희는 양산 북정에 사는 시를 쓰는 사람이다. 시인이다. 쉽게 흔들리지 않는 고집 같은 것이 내비치기는 하지만 커다란 눈에 눈빛이 맑고 순하다. 맑고 순한 눈빛만큼 다른 사람의 입장 헤아릴 줄 아는 그 모습이 시 속에서도 그대로 다 드러난다.
그러고 보니 배 시인이야말로 마음 따뜻한 참된 고수다.
문학철 / 시인ㆍ보광고 교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