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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산시민신문

'원숭이'와 '잔나비'
사회

'원숭이'와 '잔나비'

양산시민신문 기자 입력 2004/01/10 00:00 수정 2004.01.10 00:00

예로부터 동양 사람들은 나이를 곧잘 띠로 말하곤 한다. 사람이 태어난 해를 지지(地支: 子丑寅卯辰巳午未申酉戌亥)의 속성으로 상징하여 말했던 것이다. 지지 중에 '신(申)' 자가 붙은 해(이를테면 갑신년)에 태어난 사람을 '원숭이띠'라고 하였는데 그러나 이것은 요즈음 젊은 사람들이 하는 말이고 나잇살이나 자신 어른들은 ‘원숭이띠’라는 말 대신 '잔나비띠'라고 했다. 동물원에 가서 직접 그 동물을 가리킬 때에는 '원숭이'라고 하면서도, 유독 띠를 따질 때에는 '잔나비'라고 한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원숭이는 무엇보다 인간과 가장 많이 닮은 영장류 동물로 재주가 많고 부모자식과 부부지간의 애정이 사람을 뺨칠 정도라고 알려져 있다. 사람에게 붙잡혀 배에 태워진 새끼를 구하기 위해 중국 창강(長江)의 강둑을 따라 백여리나 쫓아가다가 지쳐죽은 어미 원숭이의 배를 갈라보니 창자가 마디마디 끊어져 있었다는 데서 유래한‘단장(斷腸)의 슬픔’은 원숭이의 지극한 자식사랑을 보여주는 사례다. 또 원숭이는 기호와 언어를 쓰고 사회생활을 하는 등 동물 중 가장 인간과 비슷하지만 바로 이 때문에‘간사스럽다’‘요망스럽다’는 등의 나쁜 이미지가 생겨 ‘재수없는 동물’로 기피당하기도 했다. 아마도 띠를 말할 때 ‘원숭이띠’라고 말하기보다는 '잔나비띠’라고 표현하는 것은 이 같은 속설 때문이리라.
잔나비는‘날쌔다’라 는 뜻인 '재다’라는 동사와‘원숭이’라는 뜻을 지닌‘납’이라는 명사가 합쳐진 말로 원숭이를 의미하는 옛말이다. 옛 문헌에는 17세기까지도 '원숭이'라는 단어가 나타나지 않는다. "훈민정음 해례"(1446)에 '납 위원(爲猿)'이라는 기록이 최초의 용례다.

'납'은 16세기 말까지 쓰이다가 17세기 초에 와서 '납'은 사라지고 '납'이 등장한다. '납'에 접미사 '-이'가 붙어 '납이' 또는 '나비'로도 쓰이었는데, 이는 대개 18세기 이후부터이다.

특기할 것은 기상조건이 오늘날과 달랐던 선사시대나 고대에는 우리나라에도 원숭이가 살았다는 사실이다. 평양시 상원군 검은모루동굴과 충북 청원군의 두루봉동굴, 제천 점말동굴 등의 구석기 유적에서 원숭이 뼈가 화석으로 발견돼 서식 사실이 입증되고 있다. 문헌기록으로 ‘삼국유사(三國遺事)’에 실린 이차돈 순교관련 기사를 보면 527년(법흥왕 14)에 이차돈이 처형된 뒤 “곧은 나무가 부러지고 원숭이가 떼지어 울었다”는 내용이 전한다.

그러나 이후 우리나라에는 원숭이가 살지 않는다는 ‘동국무원(東國無猿)’이란 얘기에서 알 수 있듯 중국이나 일본과 달리 원숭이에 얽힌 이야기가 흔치 않다. 송강 정철(鄭澈)의 가사‘장진주사(將進酒辭)’에 보이는 잔나비 노래가 한국문학사에서 원숭이를 소재로 한 최초의 일일 것”이라고 알려져 있을 정도다. 이때도 송강이 잔나비를 직접 보고 읊은 것이 아니고 중국 당나라 시인 두보(杜甫)의 시에서 인용한 것뿐이었다. 물론 원숭이는 조선시대 중국이나 일본에서 선물용으로 가끔 들어왔을 것으로 추정된다. 특히 이중환(李重煥)의 '택리지(擇里志)’를 보면 정유재란 때 명나라 군사들이 원숭이 수백 마리를 들여와 일본과의 전투에서 이용한 기록이 나오고 있다.

원숭이의 어리석음을 빗댄 조삼모사(朝三暮四)라는 중국 송나라 저공(徂公)의 고사도 있거니와 예부터 우리나라 민간에선 원숭이를 재수 없는 동물로 기피해왔다. 술 취한 사람을 보고 “원숭이 낯짝 같다”거나 “원숭이도 나무에서 떨어질 때가 있다”고 한 속담도 그렇고 잔나비띠 사람들의 성격을 이야기할 때 ‘재주는 많고 영리하지만 진득함이 없다’고 말하는 것도 원숭이에 대한 부정적인 인식 때문이다. 아침에 원숭이에 대해 이야기를 하면 말하는 사람이나 듣는 사람이나 모두 재수가 없다고 하는 속신(俗信)도 있어왔고 원숭이 꿈에 대한 해몽도 부정적이었다.

이처럼 민속에 나타난 원숭이는 다소 부정적이었던 반면, 통일신라시대 이후 전통미술품에선 불교와 중국의 영향 등으로 좋은 면이 부각됐다. 애절한 모정을 표현한 ‘청자원형연적(靑磁猿形硯滴)’이나 원숭이가 부귀다산의 상징인 포도넝쿨 사이로 다니면서 포도를 따먹는 모습을 그린 각종 도자기나 걸상, 십장생(十長生)들과 함께 등장하면서 장수를 상징하는 천도복숭아를 들고 있는 그림 등이 대표적이다.

원숭이해에 일어난 중요한 역사적 사건으로는 1884년의 저 유명한 갑신정변이 있고 멀리는 1392년의 조선건국과 가까이는 1932년, 일제의 간담을 서늘케 한 이봉창(李奉昌), 윤봉길(尹奉吉) 열사의 의거 등이 있다.

2004년 갑신년 새해에는 원숭이처럼 다재다능한 능력으로 어려운 문제들을 하나하나 해결해나가되 자기 재주를 너무 믿어 방심하는 일이 없도록 마음을 다잡아야 할 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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