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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산시민신문

[우리마을] 내원사 [內院寺]..
사회

[우리마을] 내원사 [內院寺]

양산시민신문 기자 입력 2004/01/31 00:00 수정 2004.01.31 00:00
그리 화려하지는 않지만 편안함이 느껴지는 곳
바람에 잔잔히 흔들리는 처마 끝의 풍경이 어울리는 곳

 하북면 용연리 천성산(千聖山) 중턱에 있는 사찰.

 대한불교조계종 제15교구 본사인 통도사(通度寺)의 말사로, 한때 내원암이라 불렀다. 신라 문무왕 때 원효대사(元曉大師)가 창건하였으며 창건설화가 《송고승전(宋高僧傳)》에 기록되어 있다.

 673년(신라 문무왕 13년)에 원효대사가 참선에 들어가 중국 대륙을 바라보았는데 당나라 태화사(太和寺)라는 절의 1천 대중이 장마로 무너져 내린 흙더미에 묻힐 순간이 원효의 눈에 비쳤다. 이것을 본 원효는 효척판구중(曉擲板求衆)이라고 쓴 현판을 던지고 그곳 대중들이 공중에 떠 있는 이상한 판자를 보고 이를 신기하게 여겨 법당에서 뛰어나오자, 곧 뒷산이 무너져 내렸다. 그리하여 1천명의 대중이 원효를 찾아와 제자가 되었다고 한다. 원효가 그들이 머물 곳을 찾아 내원사 부근에 이르자, 산신이 마중 나와 지금의 산신각 자리에 이르러 사라져 버렸다. 이에 원효는 이 일대에 대둔사(大芚寺)를 창건하고 상ㆍ중ㆍ하 내원암을 비롯하여 89개의 암자를 세웠다. 그리고 천성산 정상 부근에 큰북을 달아놓고 북을 쳐 산중의 제자들을 불러 모아 설법을 열고, 제자들에게 <화엄경>을 강론하였다. 이 때 화엄경을 가르친 자리를 '화엄벌'이라 하며, 북을 친 곳을 '집북봉'이라고 한다. 또 산을 오르던 중생들이 칡넝쿨에 걸려 넘어지는 일이 잦자, 원효는 산신령을 불러 칡넝쿨을 없애게 하였다. 그래서 오늘날에도 천성산에는 칡넝쿨이 없다고 한다. 이후 원효 밑에서 수도한 1천의 제자들은 모두 성인이 되었다고 하여 산 이름도 '천성산'이 되었다고 한다.

 조선중기에 이르러서는 대둔사 및 상ㆍ중 내원암은 없어지고 하내원암만 남았다. 1898년(광무 2년)에는 유성(有性)이 수선사를 창설하고 내원사로 개칭하였다.

 현존하는 당우로는 법당인 선나원(禪那院), 선원(禪院), 심우당(尋牛堂), 정처헌(靜處軒), 불유각(佛乳閣), 송루, 사문(寺門) 등이 있으며, 암자로는 미타암(彌陀庵), 성불암(成佛庵), 금봉암(金鳳庵), 원효암(元曉庵) 등이 있다. 문화재로는 경상남도 유형문화재 제58호로 지정된 금고(金鼓)가 유명하며, 절 일원이 경상남도 기념물 제81호로 지정되어 있다. 대표적인 비구니 수도원으로 알려져 있는 사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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