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 같은 사랑 한 번 해 봤으면 좋겠다. 사랑을 그린 영화를 많이 찍었고 사랑에 빠져보기도 했지만 밤새워 소설을 읽으면서 느꼈던 것과 같은 가슴 저린 감동은 느껴보지 못했다. 언젠가 영화배우 정윤희가 라디오 프로에 나와서 했던 말이다.
군 생활 같이 했었던 옛 동료들과 3차까지 갔다가 방 잡아 두었다는 것 뿌리치고 강남 터미널에서 심야버스에 몸을 실었는데 어느 결에 동대구 고속버스 터미널이다. 지하철 첫차를 타자면 아직 한 시간은 보내야 한다.
택시 요금 아끼려고 들어선 동대구 역 대합실에는 거기서 밤을 때운 듯한 부스스한 사람들이 추위 때문인지 이리저리 서성거린다. 매표소 앞 대기석에 털썩 앉아 옷깃을 세우고 눈을 감았다.
억지로 잠을 청하고 있는데 오징어와 마른 걸레 썩는 냄새가 섞인 것 같은 고약한 냄새에 눈을 떴다. 앞쪽 자리에 노숙자로 보이는 사람들 열댓이 모여 앉아 있다. 어디서 얻어 마신 술기운 탓일까. 아니면 추위 때문에 한잠도 못잔 탓일까. 핏발선 눈들이다.
본래 색깔이 뭔지 알 수 없는 바지가랑이를 걷어 올리고 옆구리 터진 운동화를 벗고 종아리를 긁는데 한겨울에 맨발이다. 발목 접히는 곳과 복사뼈 있는 곳이 헐고 짓물러 딱지가 더덕더덕 붙어 있다. 다리를 긁느라 드러난 팔목에도 부스럼딱지가 몇 개 붙어 있고 손등과 손가락 사이에도 짓물렀던 흔적이 보인다.
안쓰러운 마음이 들었지만 냄새 때문에 자리에서 일어나 역 대합실을 서성거리는 다른 사람들 사이에 섞였다.
세상은 그에게 가죽구두 한 켤레를 선물했네
맨발로 세상을 떠돌아다닌 그에게
검은 가죽구두 한 켤레를 선물했네
부산역광장 앞
낮술에 취해
술병처럼 쓰러져
잠이 든 사내
맨발이 캉가루 구두약을 칠한 듯 반들거리고 있네
세상의 온갖 흙먼지와 기름때를 입혀 광을 내고 있네
벗겨지지 않는 구두,
그 누구도
벗겨 갈 수 없는
맞춤 구두 한 켤레
죽음만이 벗겨줄 수 있네
죽음까지 껴 신고 가야 한다네
- 손택수 <살가죽구두> 전문 -
서울에서 약속 사이에 틈이 생겨 대형 서점에 갔다가 산 잡지에서 읽었던 시다. 열 몇 시간 전에 이 시 한 편 때문에 그 잡지를 샀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