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원사 들머리 내원모텔을 지나는 길에 만나는 -구봉서각실-
거기에 서각가 구봉(丘峰) 최환학 선생이 있다.
얼핏 보아서는 나이를 가늠하기 어려운데 60년생이란다. 불혹을 넘어 40대 중간 고개에 다다랐는데 얼굴은 동안이다.
나무가 좋아 나무 결을 매만지고 거기에 글자를 새긴 세월이 하마 10여년.
"한번 서각에 임하면 밤인지 낮인지도 모르고 미칩니다."
그래서 그랬을까? 그는 아직도 홀몸이란다. 딸린 식솔이 없으니 스스로의 예술혼을 불태우기에는 제격이겠으나 70노모의 지청구가 이만저만 아니시란다.
그도 그럴 것이 집안의 장손에 장남이 그다지 돈도 안 되는 나무에 미쳐 세월 가는 줄 모르고 있으니 그 어머니의 속이 오죽 타셨을까?
"그래도 지금은 어머니도 아주 도통을 하셨습니다. 못난 자식 덕분에 아예 도사가 다 되신 셈이죠."
그런데 그는 무슨 곡절로 이 세계에 접어들었을까?
"처음에는 수석을 했습니다."
돌에 매화문양이 박힌 매화석이나 녹색 바탕에 보라색 포도알 모양을 이룬 포도석 같은 것을 캐내어 그것을 잘 다듬어 하나의 예술작품으로 완성시키는 일을 하기를 7년여… 끌로 돌을 깎고 다듬는 일에서부터 수석의 좌대를 만드는 공력이 어쩌면 오늘의 서각예술의 입문과정이었는지 모를 일이다. 그렇게 그는 일찍이 아름다운 것을 보는 심미안과 무엇이든 매만지고 다듬는 손재주를 지녀왔던 것이다. 그러다 우연히 여덟 자 나무병풍 앞에 앉아 있는 한 예인을 만나게 되고 병풍에 새겨진 글씨와 그 앞에 정좌해 있는 예인이 품어내는 뭔지 모를 분위기에 사로잡혀 그만 서각의 길에 빠져들고 말았단다. 그때의 그이가 바로 그의 첫 서각 스승인 목인선생. 지금은 인도 어딘가로 공부하러 떠났다는 것만 알뿐 소식이 끊겼다고.
물금읍 가촌이 안태고향인 그는 살림이 꽤 넉넉했던 어린 시절을 아무 거칠 것 없이 자랐다. 한창 힘이 팔팔하던 청년시절에는 넘치는 힘을 가누지 못해 힘께나 부리면서 더러 사고도 쳤지만 한편으론 흙이 좋아 흙에 묻혀 살겠다며 4H클럽 활동을 비롯해 초등학교 동문회 회장, 마을의 청년회와 정당활동 등 날마다 역동적으로 살았다. 그랬던 그에게 서각은 실로 자신과의 처절한 싸움이 아닐 수 없었다.
"처음에는 토굴 속의 움막이나 들녘의 비닐하우스에서 작업을 했는데 참으로 견디기 어려운 고통을 치러야 했습니다. 그런데 칼과 나무를 만지면서 성격도 점차 변해지더군요. 시간이 흐르다 보니 어느새 마음에 안정도 깃들고…"
더러는 머리를 쥐어뜯기도 하고 때로는 가슴을 치기도 하면서 그렇게 인고의 세월을 보낸 그에게 지금은 칼만 들면 온 세상이 내 것이다 싶은 내공이 쌓였다. 아픈 만큼 성숙해졌나 보다.
움막과 비닐하우스를 거쳐 지금의 대궐(?)같은 작업실을 마련하고부터는 또 생각지 못한 어려움이 따랐다.
"서각실이 내원사로 이르는 길목이라 수시로 찾아오는 방문객들 때문에 시달리는 일 또한 여간 고통이 아니었습니다. 그전까지만 해도 절제된 공간에서 내 자신의 내면을 들여다보면서 오로지 작품에만 정진할 수 있었는데 새삼 숱한 사람들과 접촉을 하려니 작품할 시간도 뺏기게 되고… 그러다가 어느 날 문득, '아, 사람에게 시달리는 것도 공부구나'라는 깨달음이 찾아오더군요."
이제 그에게 세상의 부귀공명은 다 부질없다. 애오라지 서각에만 매달리는 이녁의 삶을 한없이 사랑하고 글을 새길 수 있는 좋은 나무와 조각칼이 있는 한 세상천지에 부러울 것이 없다. 그러다 보니 자연스레 그의 작품에 사람들의 눈길이 쏠리고 더불어 이런저런 상도 수월찮게 받게 되었다.
△대한민국서예대전 입선2회 △경남서예대전 입선 △부산서예대전 입선3회 △대한민국서화대전 특선 및 우수상, 동상 등을 수상하면서 이 대회의 초대작가로 위촉받고 △모악서예대전 특선2회의 영광을 안았다. 또 전시회도 △통도사 거사림에서의 불우아동돕기 선묵화전을 비롯, △국제각자연맹전 △문자와 만남전 △세 차례의 경남서각협회전 △네 차례의 통도사 성보예술제 △역시 네 차례의 양산미협 회원전을 두루 가졌다.
그래도 그에게 서각은 아직도 미완의 세계 배우고 배우고 또 배워도 다함이 없을 끝없는 길이다. 그래서 요사이도 통도사 성보박물관의 박물관대학 조형서예과정에 나가 배움의 켜를 쌓아가고 있는 일이 마냥 즐겁다. 스승은 한국서각협회 자문위원이며 대한민국서예협회 초대작가인 '화농 김진희 선생'으로 그가 화농 선생을 사사하고 있는 것은 더없는 복이란다.
"이제 대학에서 서예를 전공한 젊은 신예들이 서각계에 발을 들여놓고 있어 기성 서각인들을 잔뜩 긴장시키고 있습니다. 따라서 우리나라 서각계도 놀라운 변화와 발전이 이루어지고 있지요. 올해는 제1회 '대한민국서각대전'이 열리는데 이는 서각이 하나의 독립된 장르로 부상했다는 점에서 매우 의미 있는 일입니다."
지난날에는 글을 모르고 글씨를 쓸 줄 몰라도 다만 손재주 하나로 서각을 하는 이들이 적잖았지만 지금은 자필자각(自筆自刻)- 즉 스스로 쓴 글로 각을 하는 사람이라야 서각인으로서의 대접을 제대로 받을 수 있단다. 서각을 서예, 서화, 전각, 입체서각, 공예를 다 아우르는 종합예술이라고 보고 있는 그는 서각입문생들에게 먼저 서예를 배워오라고 권한다.
"좋은 예술이나 좋은 삶은 다 자연에 가까워야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서각의 매력 또한 가장 자연에 가까운 예술장르라는 점이죠."
스스로 택한 길을 이토록 만족해하니 이 보다 더한 행복이 어디 있을까 싶은데 그런 그에게도 행여 남모르는 아픔이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