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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산시민신문

[양산을 찾아 떠난 여행] 칠현사(七賢祠)..
사회

[양산을 찾아 떠난 여행] 칠현사(七賢祠)

양산시민신문 기자 입력 2004/02/14 00:00 수정 2004.02.14 00:00
삼대에 이은 구국충정의 일곱 넋이 잠든 곳

 그 옛날 중국 진나라 때에 죽림칠현이 있었다했던가. 서로 친교를 맺고 죽림에 모여 음주ㆍ 탄금(彈琴)하며 청담(淸談)을 나누었던 7명의 사람들. 위(魏)와 진(晋)의 양 왕조 교체기로 정변(政變)이 계속되던 당시의 귀족사회에서는 몸을 보전하기 위하여 정치에 관계하지 않고 은둔생활을 하는 풍조가 생겼는데 칠현은 그 대표적인 인물들. 그런데 이 땅, 양산에 칠현을 모신 사당이 있다는 것을 아는 이들이 얼마나 될까? 물론 양산의 칠현은 동시대의 인물이 아니고 시대를 넘어 문화 류(柳)씨의 계보를 이으며 충절을 지킨 류문(柳門)의 선조들이다.

 칠현사(七賢祠)- 삼성동 산막마을에 있는 칠현사를 이 마을 통장 류세열 씨의 안내로 돌아봤다. 이 사당은 단종 절의신과 인종 절의신, 임진란 공신, 병자호란 공신 등 일곱 어른을 모시고 있는 사당으로 현종 을미(1835년)에 봉건하여 고종 무진(1868년)에 철했다가 1964년에 복설, 오늘에 이르고 있다. 여기에 봉안되어 있는 칠현 한 분, 한 분을 살펴본다.


 ◆ 류자미
 조선의 문신. 자는 원지, 호는 서산, 현감 함의 아들. 1451년(문종1) 증광문과(增廣文科)에 급제, 사헌부감찰을 지냈다. 1456년(세조2) 사육신(死六臣) 사건이 일어나자 그 중의 한 사람인 성삼문의 딸을 데려다 숨겨 길러 자부로 삼았고, 상왕(上王)에 대한 절의를 지켜 일생을 은거하다 임종에 이르러 아들에게 “내가 임금을 위해 죽지 못했으니 내가 죽거든 선조의 무덤 곁에 장사하지 말 것이며, 장례는 불교식으로 하고 제사에는 산밤, 조밥, 미역 등으로 제물을 차리도록 하라”고 당부했다. 글씨와 그림에 능했다.


 ◆ 류광선
 자는 국빈, 호는 만풍정. 서산공의 손자이며 대사헌 진의 아들. 인종조에 형조참판을 지냈다. 을사사화 때, 인종이 승하하고 계모 소생인 명종이 등극하자 반대세력이 지나치게 강성하여 울산으로 유배되었다가 왜구의 움직임이 심상찮음을 예지하고 둘째 아들 송호와 전쟁준비에 급급하다 세상을 하직 함.


 ◆ 류 정
 자는 여원, 호는 송호. 대사헌 류진의 손자이며 만풍정공의 아들이다. 임진왜란을 당하여 나라를 구하려는 한 마음으로 의병으로 나아가 곳곳에서 적과 싸워 많은 전공을 세웠다. 그 후 정유재란 때는 대구의 팔공산으로 나아가서 창을 잡고 말달리며 적과 싸우다가 돌연 말이 쓰러지면서 적탄을 맞게 되었다. 공은 이에 굴하지 않고 옷을 벗어 찢어서 상처를 동여매고 적중으로 뛰어들어 닥치는 대로 적을 찔러 죽임이 수십이더니 힘이 다하여 정렬한 전사를 하고 말았다. 이때 같이 싸우던 조카 백춘이 고향으로 운구하여 장사 지냈다. 그의 벼슬은 선공감 부정이었으나 호판으로 증직되었다. 뒤에 경주부윤 윤인함이 그 공을 기록하여 객관에 걸었으며 경상좌병사 김응서가 감탄하여 노래를 지었다.


 ◆ 류백춘
 자는 석향, 호는 재호. 만풍정공의 손자이며 동특랑지의 아들이다. 송호공의 장질인데 창의, 정신출진, 감포기풍, 대용암 작전에서 크게 전공을 세웠다. 귀경하던 중 경주훈련원판관에 임명, 영천, 창암 작전, 대구 팔공산금전에서 대첩을 거두고 돌아와 이듬해 전투에서의 상처가 덧나 37세에 명을 다했다. 가선대부, 오위도총부, 부총관을 증함.


 ◆ 류영춘
 호는 나암. 송호공의 아들이다. 벼슬이 군수에 이르렀으나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아버지를 따라 적을 쳐서 싸우니 전공이 크게 많았다. 선조(宣祖) 27년(1594) 갑오년에 군사를 조련하여 군량을 운송 하다가 창암에서 전사하였다.


 ◆류득춘
 송호공의 조카다. 임진왜란 때 숙부를 도와 전공을 세웠다. 특히 선조 29년(1596) 병신년에는 태화강에 몰려오는 적선의 떼를 보자 하늘에 큰 바람을 빌어 이들을 뒤집어 소탕하였다. 공의 전공은 선무원종공훈 3등이었고 벼슬은 수문장에 이르렀다


 ◆ 류태영
 자는 자실, 호는 지헌. 송호공의 손자이며 나암공의 아들이다. 임진란 때, 임금과 할아버지와 아버지의 원수를 갚고자 즉시 출전, 적장을 초멸하니 그 전공으로 증통정대부, 오위도총부사, 승가선대부, 호조참판에 봉해졌다. 그 후 46년 동안 슬픔의 나날을 보내던 중 병자호란이 발발하자 역시 임금과 할아버지와 아버지의 원수를 갚을 때가 왔다하여 70노령에도 불구하고 노비와 함께 남한산성으로 달려가 호군과 백병전으로 맞서 싸우다 장렬한 최후를 맞음.
 
 이로써 삼대에 이은 구국충정의 일곱 넋이 이곳에 잠들고 있으니 이름하여 칠현사(七賢祠)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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