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민정신연구소 최상호 소장.
밀양 태생인 그가 양산에 온 것은 밀양에서 중학교를 졸업한 후인 열일곱 살 때. 아들 다섯을 낳았다가 넷을 잃은 그의 부모님은 하나 남은 아들이나마 살려야겠다는 애틋한 마음을 안고 고향땅을 떠나 미지의 땅,양산에 발을 들여놓았다.
아버지와 어머니,그리고 졸지에 외아들이 된 상호, 이들 세 식솔이 새 둥지를 튼 원동면 화제리 내화마을은 이들에게는 한 가닥 희망이 엿보이는 새 삶의 터전이었다.
"이사 온 뒤로 밥맛이 좋아지고 농사일을 하는 3년 동안에 쇠약했던 제 몸이 날로 건강해졌습니다. 덕분에 제가 오늘날 이처럼 강인한 체력을 지니게 되었으니 부모님 입장에서는 이사 온 목적은 달성한 셈이지요. 당시 아는 사람이라곤 종교적으로 아는 한 집 밖에 없어 양산이 저희에겐 완전히 낯선 곳이었습니다. 그래도 인심이 좋고 순박해서 곧 고향처럼 정을 붙이고 지낼 수 있었습니다."
소년 '상호'가 양산와서 했던 일은 농사짓는 일. 중학교 졸업 때까지 손에 대보지 않았던 농사일을 3년간 뼈 빠지게 해야 했다. 그러나 농사거리가 고작 800평밖에 되지 않았던 터라 하루에 나무를 두 짐씩 해서 가계를 보태야했다. 그러던 어느 날, 그만 도벌에 걸리고 만다. 여러 집이 함께 걸렸지만 토박이들은 다 빠져나가고 결국 타지 사람인 상호네만 남게 되었다.
"제가 경찰서 수사과엘 갔더니 '니가 최 아무개냐?'하면서 경찰관은 아버지 대신 온 저의 무릎을 걷어찼고, 이튿날 아버님이 구속됐습니다."
그러나 이 쓰라린 아픔은 어쩌면 그가 뒷날 남다른 삶을 성취하는 것을 도운 쓴 약이었는지 모른다. 중졸 후 3년만인 스무 살이 되어서야 겨우 고교, 그것도 취직이 쉽다는 실업계 고교에 입학하게 된다. 그런데 고등학교를 졸업한 그는 아무래도 더 공부를 하고 싶은 열망을 접을 수 없어 머리를 싸매고 공부한 끝에 마침내 서울대 농대에 덜컥 붙었다. 실업계 고교 졸업으로 서울대 합격에 이르자면 얼마나 피나는 노력이 따랐을까는 굳이 물어보지 않아도 다 알 수 있는 일.
여기서부터 시골 실업계고교 출신 최상호의 미래를 향한 야심찬 도전들이 이어진다.
서울대 농대 졸업,서울대 행정학 석사,서울대 교육학 박사,새마을연수원 교수,농협대학 교수를 거쳐 부학장 7년,말레이시아 코베나기술원 교수, 호주 뉴잉글랜드대학 교환교수,30여년간의 국민성 연구와 국민의식개혁 강의… 대강 훑어본 그의 프로필이다.
현재 자신이 2001년 12월에 설립한 '국민정신연구소'의 소장으로 활동하는 한편 2002년부터 도산아카데미연구원 부원장을 맡아 도산정신의 대중화를 위해 애쓰고 있는 그는 공직자,기업임직원,일반시민 등 다양한 청중을 대상으로 1년에 100여회 정도의 강연을 통해 국민정신교육과 의식개혁을 위해 분투하는 우리 시대 최고의 대중강연 강사이기도 하다.
그러나 평균 주 3회의 대중강연으로서는 한계가 있다고 생각한 그는 더욱 더 폭넓은 국민교육을 전개할 양으로 왕성한 집필활동을 곁들이고 있다.
그동안 '지역사회개발론'(박영사),'사회교육방법론'(박영사) 등 6권의 저서와 '한국 국민성의 문제와 개선방향' '韓ㆍ英 국민성의 비교연구' 등 43편의 논문을 이미 발표한바 있는데 지난 1월에는 '어떻게 살아야 부자가 될 수 있느냐'란 물음에 대한 답의 형식으로 [이래야 부자 된다]라는 제목의 저서를 발간했다. 1달도 채 지나지 않아 초판 2천부가 거의 매진됐지만 되도록 많은 국민이 빨리 이 책을 접하고 부자가 되는 것이 그의 간절한 소망이란다.
저서 출간은 여기서 그치지 않고,국가 차원에서의 부자 되는 길잡이로서 [이래야 부국 된다]를 오는 3월 중에 출간할 예정이며,자녀교육서로서 [우린 부모가 자식을 망치고 있다]와 자식배반 예방법으로서의 [안락한 노후는 그냥 오지 않는다]가 뒤를 이을 것이라고.
"대학 생활은 교수님이 주신 젖 염소 1마리를 키워 젖을 짜면서 자취를 했었죠, 졸업식장엔 후배의 양복 윗저고리를 빌려 입고 들어갔습니다." 대학원시절도 신산스럽기는 마찬가지였다. 이렇듯 젊은 날들은 참으로 고달프고 궁핍하게 보내면서도 끝내 좌절하지 않고 각고의 노력으로 남다른 성취를 일구어 낸 최 소장은 "인생엔 공짜가 없다"고 말한다.
"지금 우리 사회는 다분히 망하는 쪽으로 가고 있습니다. 대세를 따르지 말고 이를 거슬러 부자가 되는 방향으로 가야합니다. 돈과 시간을 부자 되는 방향으로 써야지요."
비록 태어나지는 않았으나 그에게 있어 고향이나 진배없는 양산에 대한 그의 바람과 기대가 각별하다.
"개발이 능사가 아닙니다. 인위적 신도시나 아파트단지 개발을 억제하여 양산 특유의 녹지 경관을 보존해야 합니다. 그것이 바로 양산을 삶의 공간으로써의 가치를 높이고 차별화할 수 있는 길이라고 확신합니다."
아내와 함께 팔순 노모를 모시고 있는 그는 슬하에 1남 2녀를 두었다. 딸들은 이미 출가했다고.
"부산 MBC의 주홍식과 교편을 잡고 있는 정진성 등…" 어릴 적 동네친구들 이름을 떠올리며 향수에 젖는 최상호 소장- 그는 누가 뭐래도 양산사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