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19년 3월,우리 양산에서도 만세소리가 울려 퍼졌다.
양산의 만세시위를 주도했던 인물들을 중심으로 역사의 수레바퀴를 85년 전 양산의 3월로 되돌려 본다.
◆ 이상환(1897. 4. 17~1943. 2. 20) 선생
1897년 4월 17일 양산 동면에서 태어난 선생은 지역청년회 활동으로 청년들에게 민족의식과 반일감정을 불어넣었다.
1919년 3월 1일 서울 파고다공원에서 시작된 3.1만세운동이 전국적으로 전개되고 있을 때 이곳 양산에서는 선생이 청년회 간부인 엄주태, 전병건, 박삼도 등과 만세시위를 계획,1919년 3월 27일 양산장날 거사할 것을 결의하고 독립선언서 등사와 태극기 제작 등 비밀리에 거사준비를 진행해갔다.
마침내 거사날인 3월 27일 양산장날 아침, 선생을 비롯한 주동청년들은 장터에 잠입, 각처에서 장꾼들로 가장 붐비는 오후 1시를 기해 독립선언서, 공약서 등을 배포하는 한편 대형 태극기를 장터 한가운데 세우고 독립만세를 선창하였다. 이에 운집한 3천여 장꾼들이 일제히 호응하여 독립만세를 불렀다. 선생을 비롯한 주동청년들이 고조된 군중의 기세를 선두에서 지휘하며 시가행진을 함으로써 만세시위의 열기가 한층 고조될 즈음, 시위 소식을 접한 일경들이 황급히 달려왔다. 출동한 일경들은 엄주태, 전병건, 박삼도 등을 체포하였으나 선생은 일단 놈들의 체포망을 피했다.
1차 시위 때 검거되지 않은 선생은 류계문 등과 다시 거사하기로 하고 4월1일 오후 2시 장터에 운집한 군중들과 독립만세를 외치며 시가행진을 하던 끝에 헌병분견소로 몰려가서 구속동지 석방을 요구하다 현장에서 체포되어 1919년 5월20일 대구복심법원에서 징역 1년6월형이 확정되어 옥고를 치렀다.
정부에서는 선생의 공훈을 기리어 1982년 대통령표창, 1990년에는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으며,1998년,선생의 탄신 101주년을 맞아 자랑스러운 우리고장출신 이달의 독립유공자로 선정되기도 했다.
◆ 안덕원(1898. 7. 9~1922. 8. 23) 선생
양산면 산막리에서 출생. 서울 중동학교에서 신학문을 배운 선생은 1919년 3ㆍ1독립운동 당시 22세의 피끓는 청년으로서 거국적으로 일어난 독립만세 운동에 가만히 앉아 있을 수 만 없었다. 마침 향리 양산에서 이상환 선생이 주도한 독립시위운동이 일어났으니,선생은 엄주태,전병건,박삼도,정주봉,이귀수,강재호 등과 함께 만세시위에 가담하였다. 거사 이전 미리 연락을 받고 자신에게 주어진 역할을 다하기 위하여 마음에 다짐을 하고 있던 선생은 거사일인 3월 27일 아침 일찍 양산장터로 나갔다. 엄주태,전병건,박삼도,정주봉,이귀수,전병한,강재호 등과 장터 한복판에서 '대한독립만세'라고 크게 쓴 깃발을 높이 든 것을 신호로 목청껏 '대한독립만세'를 불러 군중을 선동하다 일본 헌병에 붙잡히고 말았다. 부산 헌병대로 이송되어 부산감옥에 수감되었고 동년 4월 22일 부산지방법원에서 징역 8월의 형을 받았다. 이에 불복한 선생은 동지들과 함께 대구이심법원에 공소를 하여 대구감옥으로 이감되었다. 동년 5월 28일 대구이심법원에서도 일심과 같은 징역 8월의 선고를 받았다. 혹독한 옥고를 치르고 출감은 했으나, 여독으로 시름시름 앓다가 그렇게도 갈망하고 염원하던 조국의 광복도 보지 못하고 1922년 8월 23일 25세의 아까운 나이로 운명하였다.
이밖에도 비록 기미년 3월의 그날, 양산 만세시위 현장의 인물은 아니지만, 우리 양산 출신으로 우리나라 독립투쟁사에 족적을 남긴 인물들이 허다하니, 이 자랑스러운 선열들 중에는 작게나마 역사에 이름을 남긴 이도 있으나, 역사에 이름을 남기지 않은 필부필부들은 그 수를 헤아리기 어렵다. 기록을 찾을 수 있는 대로 몇 분의 공적을 더듬어 본다.
◆ 김철수(1895. 5. 4~1977. 5. 18) 선생
서기 1895년 5월4일 상북면 상삼리의 비교적 부유한 집안에서 태어났다.
일본 경응대학 재학 당시 유학생 모임인 '재동경 한국학생학우회'에 가입,기관지 '학지광' 발간에 참여하였다. 이후 조직된 재동경 유학생의 독립운동기구인 '조선청년독립단'의 11명 대표위원 중 한 사람으로 선출돼 2ㆍ8독립선언식을 주도했으니 이는,조국의 3.1독립운동의 촉매제로 우리민족사에 길이 남을 사건이었다. 선생은 동지 8명과 함께 반년 이상이나 미결수로 고생하다가 공판에 회부되어 9개월의 징역형을 선고받고 옥고를 치른 후 1920년 4월 만기 출옥했다. 1926년에 다시 고향으로 돌아와 유치원을 경영하며 어린 새싹들에게 민족혼을 심어주는 육영사업에 이바지하기도 했다. 태평양전쟁이 한창일 때 일제는 국내 유명인사들을 위협 또는 회유하여 소위 황민화운동에 앞장 설 것을 강요하였으나 그는 끝내 이를 거부하고 산중에 은거하다 1945년 감격의 8.15를 맞이하였다. 해방 후 미군정 입법의원,제2대 경남도지사,자유민보 사장 등을 역임하였고,만년에 주위의 권유로 사단법인 3.1동지회 이사장으로 있다가 1977년 5월18일 별세하였다.
◆ 김말복(1909. 6. 25~1985. 5. 27) 선생
1909년 6월 25일 양산 하북에서 태어난 선생은 양산 통도중학교 교사로 재직하면서 학생들에게 항일독립 사상과 민족의식을 고취,애국적 인재를 양성하는데 전력하다가 일경에 피체되어 징역 2년형을 선고받고 옥고를 치렀다. 출옥 후 항시 일경의 감시와 미행 속에서 괴로움을 당하다 광복을 맞이하자 통도사 주지로 임명 받아 수도승의 훈육과 종무(宗務)활동에 수년간 참여하였고,교육보국의 이념을 가지고 다시 교육계에 투신, 1964년 3월 보광중학교(통도중학교 후신) 교장으로 취임하여 정년퇴임 시까지 10여년간 후진양성에 이바지하였다. 정부에서는 선생의 공훈을 기리어 1983년 대통령표창을 수여하였고, 1990년에는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 윤현진 선생
1892년 동래부윤(東萊府尹)을 역임한 윤필은의 둘째 아들로 양산군 소토리에서 태어난 선생은 소토리 만성제서숙(晩惺齊書塾)에 입학, 한학을 공부했다
나라 없는 민족은 가장 슬픈 존재라는 쓰라린 체험을 통해 백절불굴 (百折不屈)의 투지를 가지고 17세 소년의 몸으로 항일독립 전선에 투신,30세의 꽃다운 나이로 순국했다.
◆ 윤복이(1884. 1. 22~1932. 3. 17) 선생
1884년 1월 22일 양산 원동에서 태어난 선생은 고향서당에서 학문을 이수하고, 농업에 종사하던 중 1931년 4월 4일 양산 농민조합이 결성되자 조합원으로 활동하였다.
1932년 양산농민조합 사건 때,일경의 무차별 발포로 복부 관통상을 입고 순국하신 분으로 선생의 탄신 115주년 맞아 '자랑스러운 우리고장 출신 이 달의 독립유공자'로 선정되었다.
이들 외에도 김상헌, 김옥태, 박문영, 박세민, 서현준, 손준호, 심상욱, 안병원 선생 등이 양산 출신으로 우리나라 독립투쟁사에 길이 이름을 남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