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남 창녕경찰서 남부순찰지구대 지구대장 김인찬 경감.
양산시 신기동 318번지가 본적지인 김 경감은 1955년에 가난하고 평범한 한 가정의 2남 4녀 여섯 남매의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양산초등학교를 거쳐 71년에 양산중학교를 졸업했으나 가정사정이 여의치 않아 곧바로 고교 진학을 못하고 한 해를 쉬었다가 72년에야 어렵사리 고등학교 문을 밟게 되었습니다."
양산종합고등학교- 지금의 양산고등학교다. 고교 졸업 후 그는 현실과 이상의 차이를 극복하지 못하고 잠시 방황의 세월을 보냈다. 그러다가 77년 2월에 군 입대를 하면서 스스로를 추스른 그는 군 복무를 마친 이듬해인 80년 12월에 경찰에 투신함으로써 마침내 자신의 인생행로의 지평을 열게 된다. 처음 시작은 말단 순경, 첫 부임지가 부산 동래경찰서였다.
"81년 12월에 서울로 전출하게 된 것이 고향 양산과의 긴 이별의 출발점이었습니다. 당시 고향을 떠날 때만 해도 우리 양산은 그야말로 작은 시골 소도시였지요. 현재의 이처럼 발전된 양산을 볼 때, 고향에 대한 애향심이 저절로 우러나옵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개발로 인한 무차별적인 자연훼손에 가슴이 아프기도 합니다. 이 아름다운 고장은 우리의 후손들에게 대대로 물려주어야 할 땅인데…"
청운의 꿈을 안고 서울로 올라 간 순경 김인찬은 경찰청,서울지방경찰청,서울 중부경찰서,종로경찰서,서대문경찰서를 두루 거치면서 형사반장,파출소장 등으로 봉직하다가 93년 10월에 시험승진으로 경위 계급장을 달게 된다. 당시의 승진시험은 17대 1의 치열한 경쟁이었다고 하니 그의 노력이 어떠했는가는 능히 짐작이 간다. 현 경감에 임명된 것은 지난 1월 6일,심사승진을 통해서라고.
그는 본지의 인터뷰 요청에 별 내세울게 없다며 한사코 사양을 했지만, 20년이 훨씬 넘는 세월을 애오라지 민중의 지팡이로서, 국민의 공복으로서 한눈팔지 않고 살아왔으니 그로서도 충분히 자랑스럽다 아니 할 수 없겠다.
좌우명이 ‘최선을 다하고, 행동으로 실천하자’라고 하는 그는 자신의 좌우명에 꽤나 충실한 삶을 살아왔나 보다.
"자기가 하고 싶은 일, 그것이 직업이든지 아니면 또 다른 어떤 분야이든지 한꺼번에 이루려고 하지 말고 목표를 설정하고 계획을 세워 차근차근 노력하면 반드시 좋은 결과를 얻을 수 있다는 것을 확신합니다."
이는 아마도 고졸의 시골 출신으로 날마다 충실한 삶을 살아오는 가운데 나름대로의 소박한 꿈을 성취한 김인찬 경감이 그동안의 자신의 인생역정을 통해 스스로 터득한 깨우침이리라.
"중학교 고등학교 동창회를 통해 고향친구들과의 교류를 이어가고 있고 애ㆍ경사 등에는 시간이 허락하는 한 빠지지 않고 참석합니다."
그러면서 그는 심판섭,김동열,이만재 등 고향의 동네 친구들과 전시관,임수성,박강현,김경훈 등의 동창들 이름을 읊조린다.
연세 일흔 여덟이신 어머님이 아직도 고향 양산에 계시고, 어느새 오십 고개를 바라보는 그는 아내 고석란(48) 씨와의 사이에 아들 원형(22ㆍ군인)과 딸 지혜(20ㆍ대학생)을 두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