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메뉴 바로가기 본문 바로가기

양산시민신문

[시가 있는 마을] 봄이 오는 길목에서..
사회

[시가 있는 마을] 봄이 오는 길목에서

양산시민신문 기자 입력 2004/03/26 00:00 수정 2004.03.26 00:00

 나이 들수록 삶에 여유가 생겨나야 할 일인데 장년 넘어서는 고개에 들면서부터는 오히려 삶이 팍팍해지기만 한다. 오히려 여유가 없어지고 있다. 바쁘다는 핑계로 좀 소원했었던 대학 친구들과 토요일에는 대구 동성로에서 촛불 한 자루 들고 서 있었다.

 감싸 쥔 촛불 한 자루는 성냥 한 개피보다야 따뜻했지만 아직 꽃샘추위 서슬 푸른 거리를 뎁힐 만큼 뜨거운 것은 아니었다. 그래도 아이들 손잡고 나온 장년의 따뜻한 마음들이 있고 연인 손잡고 나온 젊음의 뜨거운 마음이 있어 동성로 거리는 잠시 꽃샘추위 속에서도 한봄의 타오르는 꽃불로 가득 채워져 있었다. 이런 따뜻하고 뜨거운 마음들이 있는 한 몇몇 애비 없는 후레자식들이 눈스프레이로 한반도를 몽땅 뒤덮으려 했다고 해서 올 봄이 오지 않겠느냐고 자위할 수 있었다. 촛불로 따뜻해진 손바닥만큼 마음도 따뜻한 시간이었다. 이윽고 국채보상공원으로 시위하며 걷다가 우리 장년들은 중간에 빠져 촛불행진하는 사람들 좀 더 응원해 주고 다음 주를 기약하며 딱 한 잔 씩 나누고 헤어졌다.

 집으로 오는 중에 동성로로 나오지 않은 다른 친구에게서 전화가 왔다. 한 잔 하자고 했다.
 "나도 부패한 정치권에 염증을 느끼고 있네. 촛불 한 자루라도 같이 들지 않고 이렇게 집회 끝나고 난 다음에야 자네 만나는 것은 수구보수라서가 아니라 우려하는 것이 있어서네. 부패한 정치꾼은 국민의 재산을 도둑질하는데 그치지만 위정자의 편협함은 자칫 죄 없는 국민들의 무수한 생명을 앗아갈 수도 있네. 바른 것만이 바른 것은 아니네. 사실 난 두렵다네. 싸워 이겨 얻을 수 있는 것은 아무리 많아도 절반이 안 되네. 싸우는 동안 반 이상 깨지고 부서져 쓸모없이 되는 법이네. 그리고 싸워서 이겼다고 저쪽을 죽일 것인가. 너나 나나 같이 부서지고 다치고 나면 싸워서 얻는 것 정말 얼마 안 되네."

 "이건 싸우자는 것이 아니네. 세상에 완전한 것이 있겠는가. 너무 단정적인 대답이지만 그런 것은 없네. 그러나 좀 더 나은 것은 있는 법이네. 좀 더 나은 쪽으로 갈 수 있는 것을 선택하자는 것이네. 싸움은 저들이 걸지만 우린 싸우지 않고 조금이라도 나은 쪽으로 나가는 길을 선택하자는 것이네. 도둑들이 활개치지 않을 수 있도록 장치하는데 힘을 보태 주자는 것이네. 저들도 어쩔 수 없는 우리 중 하나라는 것 인정하네. 싸우지 않고 함께 가기 위해서라도 촛불은 더 많아야 하고 편협하지 않은 마음들이 함께 해야 할 것이네."

 

가문 섬진강을 따라가며 보라
퍼 가도 퍼 가도 전라도 실핏줄 같은
개울물들이 끊기지 않고 모여 흐르며
해 저물면 저무는 강변에
쌀밥 같은 토끼풀꽃,숯불 같은 자운영꽃 머리에 이어 주며
지도에도 없는 동네 강변
식물도감에도 없는 풀에
어둠을 끌어다 죽이며
그을린 이마 훤하게
꽃등도 달아 준다
흐르다 흐르다 목메이면
영산강으로 가는 물줄기를 불러
뼈 으스러지게 그리워 얼싸안고
지리산 뭉툭한 허리를 감고 돌아가는
섬진강을 따라가며 보라
섬진강물이 어디 몇 놈이 달려들어
퍼낸다고 마를 강물이더냐고,
지리산이 저문 강물에 얼굴을 씻고
일어서서 껄껄 웃으며
무등산을 보며 그렇지 않느냐고 물어 보면
노을 띤 무등산이 그렇다고 훤한 이마 끄덕이는
고갯짓을 바라보며
저무는 섬진강을 따라가며 보라
어디 몇몇 애비 없는 후레자식들이
퍼 간다고 마를 강물인가를
 김용택의 <섬진강 1> 전문


 

 애비 없는 후레자식들이 천막을 치고 자숙하는 척하고 있지만 이제 더 속을 사람 없다.

저작권자 © 양산시민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