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월 31일이다. 봄이다. 거리에는 목련과 벚꽃이 완연하다. 버스에서 내려서 학교까지 걸어가는 길목에는 아이들의 웃음 소리가 들리고 영대교를 지날 때 모두가 종종 걸음이다. 마지막 꽃샘 추위가 온다더니 아침 바람이 꽤 매섭다. 봄이 익기까지 이렇게 기다려야 하는 시간이 길다. 다리 위를 지나가는 아이들도, 나도 기다림에 익숙하다. 오늘은 이 긴 기다림에 관해 적고 싶다.
작년에 도서관을 만드느라 담임을 쉬었다. 양산에서 근무한지 8년만에 처음 담임을 맡지 않았는데 몸이 영 편하지 않았다. 특히 수업 시간이 즐겁지 않았는데 이제와 생각해 보니 담임을 맡지 않은 것이 악영향이었다. '내 아이'에 대한 애착이 시들해지니 수업이 즐거울 리 없었다. 교사가 모든 아이들을 '내 아이'라 생각해야 한다고 꾸짖으면 달리 할말은 없으나 그래도 세상 일이 어디 이론만으로 되던가! 팔은 안으로 굽고 고슴도치도 제 새끼가 귀여운 법. '내 아이'를 가지고 새롭게 출발하고자 다짐했다. 그리하여 파릇파릇한 1학년 담임을 맡았다. 귀여운 놈들!
첫 주는 탐색 주간이다. 나도 아이들도 서로 얼굴 익히고 상대방을 파악하는 눈길이 재빠르다. 감추어야 할 것과 드러내야 할 것 사이를 들락거리며 서서히 경계가 무너지기 시작한다. 둘째 주부터 탐색전이 끝났음을 알리는 소란이 교실에 가득하다. 내가 개입하기 전에 스스로 조용해진다는 것은 상상하기 힘들다. 재잘재잘, 조잘조잘. 넘치는 에너지가 한꺼번에 입으로 몰린 듯 소란은 쉽게 그치지 않는다. 어, 어쩌지 중학생이면 공부에 신경을 써야 하는데… 담임으로서 어떻게 저 소란을 잠재울까 고민이 시작된다. 처음 몇 번은 조용하게 타이르다 결국 언성이 높아진다. 그리고 작은 눈이 째지면서 인상을 그린다. 이러기를 몇 번 반복하면 아이들은 금방 길들여진다. 담임이 뜨면 자동적으로 조용해지고 담임이 나갈 때까지 묘한 침묵이 흐른다. 싫다, 이런 침묵이. 싫다, 이런 길들여짐이.
오후에 청소를 마치면 아이들이 다 가 버린 교실에 홀로 남는다. 교실에 지저분한 것이 떨어져 있으면 휴지통에 넣고 어지러운 책상도 가지런히 놓아 본다. 그리고 다시 교탁에 서서 분필을 잡는다. 흡사 내 앞에 아이들이 있는 것처럼 아침 인사를 한다. 처음에는 쑥스러웠는데 자주 하니까 꽤 자연스럽다. 이것도 길들임인가. 아니다. 이건 솔직함이고 자유로움이다. 오늘 내가 못 다한 이야기를 칠판에 써 내려간다. 내일 아침이 좀더 즐거웠으면 하는 바람과 좀더 솔직하고 좀더 행복한 교실이 되기를 바라는 내 마음이 얼마나 전달될는지…
이제 한 달이 거의 지났다. 짧은 시간이었지만 사건 사고도 많았고 좋아함과 미움과 즐거움과 괴로움이 책상 곳곳에 숨어 있다. 그러면서 오늘 아침처럼 나는 기다림에 대해 생각한다. 교사는 기다리는 사람이다. 아이들의 미움이 따뜻한 정으로 변하기를, 아이들의 서투름이 익숙함으로,아이들의 눈물이 희망으로 그리하여 아이들이 다 자라서 돌아오기를 기다리는 늙은 느티나무이며 오래된 교문이다. 아이들 또한 마찬가지다. 선생님이 자기를 이해해 주기를, 가정이 자기를 아껴주기를, 사회가 자기를 품어주기를 기다리며 자라는 것이다.
나와 아이들의 기다림 사이에 믿음의 긴 끈이 있기를. 그 끈을 놓지 않도록 서로가 아끼며 1년을 보내리라. 이 꽃샘추위가 지나고 완연히 넘치는 봄 햇살처럼 맑고 환하게 문을 열리라. 꽃 피는 1학년 3반이여 영원하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