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란 녹이 낀 구리 거울 속에
내 얼굴이 남아 있는 것은
어느 왕조의 유물(遺物)이기에
이다지도 욕될까.
나는 나의 참회(懺悔)의 글을 한 줄에 줄이자.
- 만 이십사 년 일 개월(滿二十四年一個月)을
무슨 기쁨을 바라 살아 왔던가.
내일이나 모레나 그 어느 즐거운 날에
나는 또 한 줄의 참회록(懺悔錄)을 써야 한다.
- 그 때 그 젊은 나이에
왜 그런 부끄런 고백(告白)을 했던가.
밤이면 밤마다 나의 거울을
손바닥으로 발바닥으로 닦아 보자.
그러면 어느 운석(隕石) 밑으로 홀로 걸어가는
슬픈 사람의 뒷모양이
거울 속에 나타나온다.
윤동주의 <참회록> 전문
내 한 몸 아무리 순결하게 닦고 보아도 '파란 녹이 낀 구리 거울'에 비춰진 모습은 부끄럽기만 하다. 하지만 부끄럽다는 고백만 해서 문제가 해결되는 것이 아니다. '내일이나 모레나 그 어느 즐거운 날에' 부끄럽지 않기 위해서는 거울에 낀 녹을 손바닥만으로 닦이지 않는다면 발바닥으로라도 닦아야 한다. 밤이면 밤마다 닦아가다 보면 녹은 사라지고 거울 속에 내 모습이 나타나온다. '어느 운석(隕石) 밑으로 홀로 걸어가는 슬픈 사람의 뒷모양'이 나타나오는 것이다.
"그런데 선생님."
"응?"
"거울에 자기 뒷모양이 비춰지나요? 아무리 깨끗이 닦아도 자기 뒷모양이 비춰지지는 않을 것 같은데요."
"맞아. 거울에 자기 뒷모양을 바로 비춰볼 수 있는 사람은 없지. 그런데 윤동주는 왜 뒷모양이 나타나온다고 했을까?"
"……."
"나는 지금 여기 서 있는데 거울을 다 닦아 낸 내일이나 모레나 그 어느 즐거운 날을 걸어가는 내 모습은 지금으로 보면 미래의 내 모습이니 그 뒷모습이 내게 보이겠지. 걸어가는 내가 잔상 하나로 서서 계속 걸어가는 나를 보면 뒷모양만 보일 거잖아."
"뒷모양이 비춰지는 것은 알겠어요. 그런데 즐거운 날을 맞은 자신의 모습이 왜 슬픈 사람의 뒷모양이죠?"
"다음 시를 보면 이해가 될 거야. 우물 속은 자기의 내면이야. 부끄러운 현실을 극복하기 위해서 밤이면 밤마다 손바닥으로 발바닥으로 거울을 닦아야 하는 것도 자신의 숙명이지만 달과 구름과 하늘과 바람과 가을을 사랑하는 사나이도 자신의 숙명인데 외딴 우물 속에 미워하여 가두어 두었으니 슬픈 사람의 뒷모양이 될 수밖에 없지 뭐. 우물 속에 가두어 둔 사나이가 어쩌면 시인으로서의 윤동주가 가장 살고 싶어 했던 삶이 아니었을까."
산모퉁이를 돌아 논가 외딴 우물을 홀로 찾아가선 가만히 들여다봅니다.
우물 속에는 달이 밝고 구름이 흐르고 하늘이 펼치고
바람이 불고 가을이 있습니다.
그리고 한 사나이가 있습니다.
어쩐지 그 사나이가 미워져 돌아갑니다.
돌아가다 생각하니 그 사나이가 가엾어집니다.
도로 가 들여다보니 사나이는 그대로 있습니다.
다시 그 사나이가 미워져 돌아갑니다.
돌아가다 생각하니 그 사나이가 그리워집니다.
우물 속에는 달이 밝고 구름이 흐르고
하늘이 펼치고 파아란 바람이 불고 가을이 있고
추억처럼 사나이가 있습니다.
- 윤동주의 <자화상> 전문 -
우리는 아침저녁으로 맑고 깨끗한 수은거울을 보며 살고 있다. 윤동주처럼 파란 녹이 낀 구리 거울을 들여다보며 살지는 않는다.
그런데 과연 그럴까. 식민지 체제를 우리는 완전히 극복한 것일까. 끝낸 것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