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제는 투표하는 날이었다.
내 한 표는 참 작았다. 몇 천만 분의 1에 불과할 뿐이었다. 그래서 더 소중했다.
나보다 힘센 사람도 한 표,나보다 힘 약한 사람도 한 표일 뿐이다. 잘난 사람도 못난 사람도 덕 있는 사람도 없는 사람도 선한 사람도 악한 사람도 모두 한 표일 뿐이다. 그래서 내 한 표가 더 소중했다.
그제는 투표하는 날이었다. 물방울 하나처럼 작은 내 한 표로 세상의 흐름을 결정하는 날이었다. 내가 가고 싶은 방향을 드러내 보이는 날이었다.
누구나 다 완전하지 못하기 때문에 똑 같다고 해서는 안 된다. 세상에 완전한 것은 없다. 항구적으로 옳은 것도 없다. 지금 현재 가능한 것 중에서 그래도 상대적으로 옳아서 현재와 미래를 바른 방향으로 열어갈 방향으로 내 뜻을 드러내 보여야 한다.
그래서 내 한 표는 세상을 바꿔내는 것으로 그 무엇보다 소중한 것이다.
육사는 이 세상을 어떻게 바꾸고 싶었던 것일까. [광야(曠野)]를 통해 살펴보자.
까마득한 날에
하늘이 처음 열리고
어디 닭 우는 소리 들렸으랴.
모든 산맥들이
바다를 연모(戀慕)해 휘달릴 때도
차마 이곳을 범(犯)하던 못하였으리라.
끊임없는 광음(光陰)을
부지런한 계절이 피어선 지고
큰 강물이 비로소 길을 열었다.
지금 눈 내리고
매화 향기(梅花香氣) 홀로 아득하니
내 여기 가난한 노래의 씨를 뿌려라.
다시 천고(千古)의 뒤에
백마(白馬) 타고 오는 초인이 있어
이 광야에서 목놓아 부르게 하리라.
이육사의 [광야(曠野)]전문
광(曠)은 빈들이란 말이니 광야(曠野)는 사람이 없는 빈들이란 말이다.
'나'는 지금 태초라고 할 수 있는 까마득한 날로부터 지금까지 어느 누구도 발 딛어 본 적 없는 들판 앞에 서 있다. 여기는 바다를 연모해 휘달리던 산맥도 침범하지 못한 신성한 공간이다. 그 속으로 새문명의 큰 흐름을 타고 와서 나는 여기 서 있다. 아직은 매화향기만 홀로 그윽한 눈 내리는 이른 봄이지만 이곳에 나는 가난한 노래를 부르는 문명을 건설할 것이다. 그래서 천고(千古)의 뒤에 백마타고 오는 초인과 같이 우리는 이 가난한 노래의 수확물을 마음껏 노래할 것이다.
그런데 가만? 지구상에 새 문명을 건설할 만한 넓은 빈 벌판이 존재할까? 그리고 왜 풍요의 노래가 아니고 가난한 노래일까. 또 왜 천고의 뒤일까. 참고서나 문제집에는 답이 없는 질문들이다.
우선 광야(曠野)는 자연의 빈들이 아니라 문명의 빈들로 읽어야 한다. 사람이 살지 않는 공간이 아니라 사람들이 아직 가난한 노래를 모르는 세계라는 것을 강조한 표현이다.
그렇다면 가난한 노래는 무엇인가. 성경에 보면 '마음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라는 말이 있다. 그러니까 가난하다는 것은 욕심이 없다는 말이다. 소유에 욕심내지 않는 새 문명을 건설하겠다는 말이다.
송강의 [관동별곡(關東別曲)]에 보면 '궁왕 대궐 터에 오작(烏鵲)이 지저귀니 천고(千古) 흥망을 알고 지저귀는 것이냐 모르고 지저귀는 것이냐' 하는 말이 보인다. 여기서 천고란 아득한 옛날부터 지금까지의 역사에 대한 인식의 시간을 가리키는 말이다. 그러니까 먼 훗날이 아니라 아득한 옛날부터 지금까지의 역사에 대한 인식을 바탕으로 한 바로 오늘의 다음을 가리키는 말이다.
육사는 소유에 욕심내지 않아도 될 새 문명 건설을 위해 기꺼이 한 알의 씨앗이 되고자 한 것이다.
오늘 우리는 씨앗으로 스스로 희생까지 하지는 않더라도 세상을 바로 흐르게 할 소중한 한 표를 버려서는 안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