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림책을 보다보면 어떤 책들은 언젠가 내가 본 듯하고 느꼈음직한 느낌들이 전해진다. 율리슐레비츠의 '새벽'을 봤을 땐 예전 새벽 안개속을 경운기 타고 지나갔던 시골길의 신비로운 설레임과 겹친다. 가을산의 저물어가는 아름다움에 가슴 설레일 땐 대지마 게이자부로의 '아기곰의 가을 나들이'의 장면들과 겹쳐진다. 그림책과는 풍경도 상황도 전혀 다르지만 그 아련한 설레임은 겹쳐져 두배, 세배로 감동을 받곤해 그림책의 매력에 흠뻑 빠지게 한다.
누구나 한번 쯤 달밤에 대한 기억들은 있을 것이다. 나는 한겨울 보름달 환한 시골의 한밤중을 좋아한다. 감히 누구도 흐트릴 수 없는 그 차고 시린 느낌과 고요함에서 오는 신비로움을 좋아한다. 어린시절 한밤중인데도 파란하늘이 다보여 밤임을 의심하게 했던 시퍼런 보름달밤의 기억과 한겨울 손과 볼이 다 얼어가며 그 신비로움에 감탄했던 눈내린 시골 보름밤의 기억은 아직도 내게 신비한 느낌으로 생생하게 남아있다. 존 쇤헤르가 그리고 제인 욜런이 글을 쓴 '부엉이와 보름달'을 보았을 때 내 어린시절 신비했던 달밤의 기억이 겹쳐져 나는 또다시 설레였다.
'부엉이와 보름달'을 넘기면 첫장에 나오는 대낮과는 다른 환한 달밤을 만났을 때 금방 차고 시린 달밤 속으로 빠져든다. 집안의 막내 인 듯한 아이는 처음으로 아빠와 매서운 겨울밤 부엉이를 만나러 숲으로 들어가 숲과 부엉이와 달밤과 하나가 되는 경이로움을 느끼고 돌아오는 이야기다. 표지 그림을 빼곤 전체 그림에 환한 보름달은 한번도 나오지 않는다. 그러나 차고 시린 보름달 밤임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은밀한 의식을 치르 듯 처음으로 아빠를 따라 나서게 된 아이는 더 이상 집에서의 아이가 아니다. 말을 참고 무서움을 참고 또 베일 듯한 추위도 참아내며 기다리고 기다린다. 부우우우우우엉-부우우우우우엉 아빠가 부엉이를 부르는 장면에서 아이도 책 밖의 나도 따라서 불러본다. 멀리서 들리던 부엉이 소리가 점점 가까워지고 드디어 아이와 마주보고 섰을 때 아이는 이미 숲의 일부가 되어 있다. 경이로움에 목이 메인다.
마지막 아빠에게 안겨 돌아오며 아이는 아빠가 부엉이 구경을 갈 때 늘 말씀하던 말에 확신을 가진다. '부엉이 구경을 가서는 말할 필요도 따뜻할 필요도 없단다. 소망말고는 어떤것도 필요없단다' 아빠는 늘 이렇게 말했습니다. 저렇게 눈부신 부엉이와 보름달 아래를 침묵하는 날개에 실려 날아가는 소망말이예요.
나는 아이들과 숲에 갈 땐 항상 아이들에게 우린 숲의 주인이 아니라 단지 잠깐 들르는 손님일 뿐이라고 당부를 한다. 숲의 주인인 살아있는 모든 생명에게 피해를 주지 않게 조심하자고 서로에게 주의를 준다. '부엉이와 보름달'속의 아이는 부엉이를 만나러 가며 온전히 자연과 하나가 된다. 이런 경험이 있는 아이에게 숲은 생명을 가진 살아있는 존재로 다가올 것이다. 꼭 겨울이 아니면 어떤가? 내겐 겨울밤이 설레임으로 다가왔다면 내 아이들에겐 한여름밤의 밤하늘이 숲속의 고요함이나 새벽녘 아름다움이 설레임으로 다가올 수도 있다. 아이들이 그림책을 보며 나와 같은 설레임을 맛본다면 얼마나 행복할까.
★ 존 쇤헤르 그림 / 제인 욜런 글 / 박향주 옮김 / 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