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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산시민신문

[시가 있는 마을] 오월,푸른 색(色)의 세계(世界)에서..
사회

[시가 있는 마을] 오월,푸른 색(色)의 세계(世界)에서

양산시민신문 기자 입력 2004/05/07 00:00 수정 2004.05.07 00:00

 한 주일 사이에 상가(喪家) 두 곳을 다녀왔다. 문상(問喪)하며 보면 여러 갈래 보이고 보이지 않는 길들로 닿고 닿지 않는 사람들이 한 가득 모였다 흩어지며 죽은 이를 떠나보낸다. 죽음은 삶의 다른 한 면일 것이다. 죽음을 생각하지 않고 삶을 생각할 수 있을까.
 산다는 것을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 아이들을 만난 맨 첫 수업 시간이면 나는 삶에 대해서 한 시간 남짓 이야기한다.

 삶이란 살아가는 것이다. 삶은 명사가 아니라 현재진행형이다. 다 살고 나서 보석처럼 남는 것이 아니라 지금 여기서 경험하는 것이다. 경험하는 것이란 느끼고(감각하고),생각하고,행동하는 것이다. 감각,생각,행동 가운데 어느 하나를 빼버리고 삶을 생각할 수는 없다. 그 셋 가운데 가장 바탕을 이루는 것이 감각이다.

 하지만 감각이란 얼마나 허망한 것인가. 감각이란 견딜 수 없이 엷어 결국 겉만 있고 속이 없는 형상과 같다. 삶이 바로 그렇고 존재가 바로 그렇다. 속없는 겉으로 만든 것이 존재의 본질이며 삶의 한 형상이다. 그래서 우리가 사는 세계를 색(色)의 세계(世界)라 한다. 색즉시공 공즉시색(色卽是空空卽是色)이라 한다.
 

여명(黎明)에서 종이 울린다.
새벽 별이 반짝이고 사람들이 같이 산다.
닭이 운다. 개가 짖는다.
오는 사람이 있고 가는 사람이 있다.

오는 사람이 내게로 오고
가는 사람이 다 내게서 간다.

아픔에 하늘이 무너졌다.
깨진 하늘이 아물 때에도
가슴에 뼈가 서지 못해서
푸른빛은 장마에
넘쳐흐르는 흐린 강물 위에 떠서 황야(荒野)에 갔다.

나는 무너지는 둑에 혼자 섰다.
기슭에는 채송화가 무더기로 피어서
생(生)의 감각(感覺)을 흔들어 주었다.

 김광섭의 <생(生)의 감각(感覺)>전문
 
 시인이 고혈압으로 쓰러져서 일주일을 버티다가 깨어난 경험을 형상화한 작품이다. 하늘이 무너지고 생명의 푸른 기운이 죽음의 흐린 강물 위에 떠내려가는 것과 같은 죽음을 체험하고 그 죽음으로부터 부활에 가까운 생명의 회복을 경험한 것을 형상화한 것이다.

 삶의 세계를 차안(此岸)이라 하고 죽음의 세계를 피안(彼岸)이라 한다. 동양이든 서양이든 죽음의 세계로 가는 것을 강을 건너 피안(彼岸)으로 가는 것으로 이야기한다. 차이라면 동양에서는 누런 강을 건너간다면 서양에서는 검은 강을 건너간다. 이 시 속에서도 푸른 빛(생명)이 장마에 넘쳐흐르는 흐린 강물 위에 떠서 황야(피안)에 갔다고 했다. 그 강의 무너지는 둑에 혼자 섰다가 기슭에 핀 채송화 무더기의 아름다운 생명에 이끌려 생(生)의 감각(感覺)을 되찾은 것이다.

 죽음에 떠내려가지 않고 삶의 차안으로 돌아옴으로써 여명(黎明)에서 종소리를 듣고 새벽 별의 반짝임과 사람들의 소리, 닭이 우는 소리, 개가 짖는 소리를 듣는다. 감각의 세계로 돌아 온 것이다. 차안의 이 엷어 속없는 것으로 만든 것 같은 존재의 세계로 돌아 온 것이다.

 이 차안의 세계는 미망(迷妄)이지만 내가 만든 것이다. 내가 존재함으로써 존재하는 세계이다. 그래서 모든 것이 내게로 오고 다 내게서 가는 것이다.
 
 한 주일 사이에 산천은 싱그러운 생명으로 가득 채워 눈부시게 푸르러졌다. 오월 눈부신 햇살아래 기름기 자르르 흐르는 신록으로 가득한 산천이다. 저 신록의 눈부신 생명 속에서도 죽음의 깊은 어둠은 조금씩 자리를 넓혀갈 것이다.


 
 그래도 좋다. 미망이라도 좋다. 눈부시게 아름다운 오월이 또 다시 우리의 헛된 감각을 일깨우는 삶을 열고 그 헛것 속에서의 삶이라도 좋다. 살아 있다는 것이 더 없이 좋은 오월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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