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넷 다음(Daum) 카페 [시하늘] 주인인 가우 시인이 통도사에 왔다는 핑계로 몇이 모여 한 잔 걸친 것이 시발이 되었다. 시적 허구의 한계를 어디까지로 잡을까 하는 이야기로 갔다가 시와 삶에 대한 이야기들이 꼬리를 무는 바람에 조절이 안 되었던 모양이다. 뒷골이 쑤시고 눈이 뻑뻑하고 아프다.
아끼는 것 잃어서 좋을 일은 없다. 대수롭지 않았던 것도 잃고 보면 그게 대단히 소중하다는 것을 알게 하는 경우가 많다. 그런데 역설적이게도 잃고 나서야 얻는 것도 있다.
쫓기던 일 가까스로 마무리하고 숨 돌리려는 순간 덜컥 앓아눕는다. 열과 어지러움과 통증 속을 헤매다가 고비 넘기고 보면 내 속에 아직 남아 있는 병이 소곤소곤 이야기하며 보여준다. 지금까지 뒤좇아 온 일들이 얼마나 허망할 정도로 가벼운 것들이었는지를, 얼마나 아름답고 가치 있는 것들을 던져두고 있었던 지를. 병은 건강할 때에는 돌아보지 않았던 삶의 참된 아름다움을 되돌아보게 한다.
어딜 가서 까맣게 소식을 끊고 지내다가도
내가 오래 시달리던 일손을 떼고 마악 안도의 숨을 돌리려고 할 때면
그때 자네는 어김없이 나를 찾아오네.
자네는 언제나 우울한 방문객
어두운 음계를 밟으며 불길한 그림자를 이끌고 오지만
자네는 나의 오랜 친구이기에 나는 자네를
잊어버리고 있었던 그 동안을 뉘우치게 되네.
자네는 나에게 휴식을 권하고 생(生)의 외경(畏敬)을 가르치네.
그러나 자네가 내 귀에 속삭이는 것은 마냥 허무
나는 지그시 눈을 감고, 자네의
그 나직하고 무거운 음성을 듣는 것이 더없이 흐뭇하네.
내 뜨거운 이마를 짚어주는 자네의 손은 내 손보다 뜨겁네.
자네 여윈 이마의 주름살은 내 이마보다도 눈물겹네.
나는 자네에게서 젊은 날의 초췌한 내 모습을 보고
좀더 성실하게, 성실하게 하던
그 날의 메아리를 듣는 것일세.
생애의 집착과 미련은 없어도 이 생은 그지없이 아름답고
지옥의 형벌이야 있다손 치더라도
죽는 것 그다지 두렵지 않노라면
자네는 몹시 화를 내었지.
자네는 나의 정다운 벗, 그리고 내가 공경하는 친구
자네가 무슨 말을 해도 나는 노하지 않네.
그렇지만 자네는 좀 이상한 성밀세.
언짢은 표정이나 서운한 말, 뜻이 서로 맞지 않을 때는
자네는 몇 날 몇 달을 쉬지 않고 나를 설복(說服)하려 들다가도
내가 가슴을 헤치고 자네에게 경도(傾倒)하면 / 그때사 자네는 나를 뿌리치고 떠나가네.
잘 가게 이 친구 생각 내키거든 언제든지 찾아주게.
차를 끓여 마시며 우리 다시 인생을 얘기해 보세그려.
조지훈의 <병(病)에게>전문
병(病)은 '나'의 친구로 두려움을 주기도 하지만 오히려 삶의 소중함을 깨닫고 죽음을 초탈하게 함으로써 인생의 의미를 다시 한 번 생각하게 한다. 무거울 수 있는 병과 죽음과 인생의 아름다움이라는 주제를 '자네'와 '나' 사이의 차분하고 친근감 있는 대화를 통해 생각하는 시간을 갖게 한다. '잊어버리고 있었던 그 동안을 뉘우치게 되네', '좀더 성실하게, 성실하게 하던 / 그 날의 메아리를 듣는 것일세'라고 하여 병을 통하여 인생의 의미를 생각하고, 병과 죽음으로부터 초탈한 삶의 자세를 보여 준다.
비가 와야 우산을 찾고, 아파야 건강을 생각하고, 죽음에 부딪쳐야 삶을 생각한다. 언젠가 모든 것이 너무 늦어 어찌할 수 없는 때가 닥치게 되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