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 '간디'라는 이름으로 학교가 시작된 지도 수년이 흘렀습니다. 온갖 시행착오를 겪으면서 교육이라는 것이 이토록 어렵구나 하는 한계도 느끼면서, 또한 이렇게 하면 안 되는구나 라고 깨달음을 갖기도 했던 구도의 시간이었던 것 같습니다. 대안학교 교사로 지내는 사람들은 어떤 마음으로, 어떻게 아이들과 뒹굴며 살아가는지를 다시 생각하게 됩니다.
그동안 '헌신과 희생'이라는 부담스러운 이름으로 포장이 되기도 하고, 일반학교 교사보다도 실력이 떨어지는 것 아니냐는 질책과 정체성의 혼란을 겪기도 하였습니다만 대안학교 교사가 된다는 것은 많은 고민과 의미가 나름대로 주어지는 것 같습니다. 거품이 빠지면서 대안교육의 정체가 드러나고 있는 마당에 대안학교 교사들은 어떻게 해야 하는가를 성찰해 보는 것은 결코 놓쳐서는 안 될 화두인 것 같습니다.
대안적 삶을 살기로 한 교사들인가?
대안교육이란 '대안적 삶을 위한 교육'입니다. 이시대의 잘못된 가치관과 문화를 따르는 것보다는 좀 더 대안적인 삶을 살아야겠다는 결단에 따른 '삶의 선택'이라는 것이지요. 무엇보다도 '공적 가치'를 선택한 이들이 스스로 걸어가는 길이 아니면 대안학교 교사가 되기는 어렵다는 것입니다.
물론 살면서 그렇게 되지 못하는 자신을 발견하기는 합니다만 일반학교보다 적은 임금과 열악한 환경을 감내하게 만드는 것은 자신이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가치를 선택했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생태적 삶, 봉사적 삶, 전인적 삶을 이야기하는 간디학교에서 이러한 핵심가치에 동의하지 않고 들어온 교사는 없다고 봅니다.
대안적 삶을 살아가기 위한 한 과정으로 교사를 선택했다면 나이가 들어 학교근처에서 농사를 짓거나 다른 일을 한다고 해서 전혀 다른 삶이 되지는 않겠지요. 세상을 바라보는 눈이 어떤가에 따라서 우리가 살아가는 모습도 일관성 있게, 그러나 다양한 모습으로 펼쳐질 수 있다고 봅니다.
학교생활에서 가치를 선택한 사람들의 가장 큰 변화는 '눈'이 바뀐다는 사실입니다. 먼저 아이들을 바라보는 눈이 달라지지요. 간디를 찾아오는 방문객들의 가장 큰 관심은 다른 학교와 과연 뭐가 다른가 하는 것입니다. 공차는 시간보다 공 주워오는 시간이 더 많은 조그마한 운동장을 바라보면서 그들은 도대체 뭐가 다르기에 대안이냐고 직설적으로 묻고 있는 것입니다.
딱 한 가지 자신있게 말씀드릴 수 있는 것이 바로 '눈'입니다. 아이들을 결코 성적이나 보이는 것으로 바라보고 평가하지 않는 눈이 있다는 것이지요. 말처럼 쉽게 바뀌지 않는 것이 우리들의 고정관념입니다. 눈을 바꾼다는 것은 많은 고민과 수련이 필요합니다. 의식적으로 무의식적으로 우리는 세상적 기준에 따라 아이들을 재단하는 데 익숙하게 살아왔기 때문입니다.'평등'을 실험하고 '사랑과 자발성'에 따라 아이들과 함께 학교를 만들어 간다는 것은 아무도 가르쳐 주지 않는 길을 따라 가는 순례자 같은 삶을 의미합니다. 또한 규칙을 만들어 효율적으로 학교를 운영하기보다는 아이들의 삶을 직시하고 기다려 준다는 것 또한 '눈'을 달리하지 않고서는 불가능한 일이지요.
학교는 삶의 공간입니다. 이곳에서 벌어지는 모든 일들이 교육의 틀 속에 포함됩니다. 다투고 고민하고 방황하는 아이들의 모습에 마음 아파하지만 쉽게 다가서서 이래라 저래라 할 수 없는 짝사랑 교사의 애처로운 모습도 발견됩니다. '삶을 나누는 교사'라는 명제는 교사가 노동자냐 아니냐, 존경과 친밀감 중 어느것이 우선이냐라는 세간의 담론을 넘어서게 하는 무엇을 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