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생리 뗌에요."
부끄럼을 모르는 것일까. 아니면 당돌한 것일까. 예전에는 생각지도 못했던 말을 전혀 스스럼없이 한다. 하긴 생리대를 슈퍼마켓 진열대에 진열해 두고 팔아 아가씨가 아저씨에게 아무런 스스럼없이 사는 세상이다.
일전엔 여학생들이 쉬는 시간에 소타기말타기 놀이를 해서 꾸중했더니 남학생들이랑 같이 하기도 한다며 그게 뭐가 이상하냐고 했다. 집사람에게 그 이야기를 했더니 "서로 남학생, 여학생으로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그냥 같은 반 친구로 생각해서 그렇겠지 뭐."하며 대수롭지 않다는 듯이 받아들인다.
이런 집사람의 열린 생각은 섹스를 직설적이면서도 자연스럽게 시에 끌어들인 시인들이 대부분 여류 시인들이라는 것과 연결되는 것일까. 군에서 성인 잡지와 비디오를 통해 나신과 더 깊은 속살, 섹스의 적나라한 장면을 처음 보았을 때의 충격으로 섹스를 직설적이면서도 자연스럽게 시 속에 끌어들였던 여류시인들의 시를 읽었던 생각이 난다.
그렇다. 깊이 생각해 보지 않아도 섹스는 아름다운 것이다. 임신의 짐만 지지 않을 수 있다면 남자 여자가 사랑만큼 깊게 서로를 나눌 수 있는 것이 어디 있을까. 본질적으로 아름다운 것을 아름다운 그대로 다 드러내는 것은 그 다 드러냄의 도전적인 아름다움까지 더한 아름다움을 지닌다.
하지만 감출 것 감추어 아슬아슬한 경계 넘지 않아야 더 깊은 떨림으로 아름다운 경우가 많다.
생리통의 밤이면 / 지글지글 방바닥에 살 붙이고 싶더라 / 침대에서 내려와 가까이 더, / 소라냄새 나는 베개에 코박고 있노라면 // 푸른 연어처럼 … // 나는 어린 생것이 되어 / 무릎 모으고 어깨 곱송그려 / 앞가슴으론 말랑말랑한 거북알 하나쯤 / 더 안을 만하게 둥글어져 / 파도의 젖을 빨다가 내 젖을 물리다가 / 포구에 떠오르는 해를 보았으면 / 이제 막 생겨난 흰 엉덩이를 까불며 / 물장구를 쳤으면 모래성을 쌓았으면 싶더라 // 미열이야 시시로 즐길 만하게 되었다고 / 큰소리 쳐놓고도 마음이 도질 때면 / 비릿해진 살이 먼저 포구로 간다 // 석가도 레닌도 고흐의 감자먹는 아낙들도 / 아픈 날은 이렇게 혁명도 잠시 / 낫도 붓도 잠시 놓고 온종일 방바닥과 놀다 가려니 / 처녀 하나 뜨거워져 파도와 여물게 살 좀 섞어도 / 흉 되지 않으려니 싶어지더라
김선우의 <포구의 잠> 전문
생리통의 밤. 감추는 것 없이 치열하게 마음 속 깊은 곳까지 다 벗어 보이고 있지만 언어의 절제를 통해 아른아른 잘 드러나지 않는 것 있어 더 깊은 떨림으로 아름답기만 하다.
야자 때문에 한 달에 두 번, 아니 세 번도 생리통을 하는 녀석들이 있어도 가끔은 눈 감고 지글지글 방바닥에 살 붙이고 싶은 미열을 나도 겪어 봐야 하지 않을까. 어린 생것으로서의 싱그러운 날이 인생에 얼마나 되겠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