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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산시민신문

[교단일기] 기 싸움
사회

[교단일기] 기 싸움

양산시민신문 기자 입력 2004/07/03 00:00 수정 2004.07.03 00:00

 "여보세요? 00아, 어디고? 느그집 근처인 것 같은데, 못 찾겠다."
 "어, 내 지금 여기 부산인데.. 친구들이랑 노는데요."
 "가시나야, 어제 내가 느거집 간다카더라아이가. 철떡같이 약속해놓고 지금 와 거기있노?" "아, 선생님, 깜빡했어요. 내 지금 바쁜데요. 끊을께요"
 
 이 아이와의 첫 만남(내가 그 아이를 기억하는.…)은 이렇게 시작되었다. 1월에 벌써 반 편성을 다 하고 겨울방학 때 가정방문을 실시하기로 했는데, 매서운 겨울바람이 부는 어느 날, 나의 첫 가정방문은 이렇게 어이없이 끝났다.
 
 개학 첫날, 벌써 지각하는 학생이 생기다니….
 어떤 강철심장을 가졌길래, 개학 첫날부터 지각인지. 게다가 가정방문 때 바람맞은 기억까지 있었던터라 무척 궁금했다. 9시가 다 된 시간, 교실에 아무렇지도 않게 들어오는 한 아이를 보며 '아, 쟤가 00구나' 라고 생각했다.
 폭탄 맞은 듯 부푼 머리, 짙고 굵게 그린 눈썹, 그리고 엷게 파운데이션까지 바른 얼굴. '왜 지각했느냐'는 나의 추궁이 이어지고, 귀찮다는 듯이 그 아이가 툭 던지는 한마디.
 "일찍 올께요"
 
 그날부터 그 아이의 지각은 계속되었다. 때로는 오전 수업을 몽땅 빼먹기도 하고, 조금만 아프면 그냥 학교를 안 와버리기 일쑤이고, 전날 밤 무얼 하는지 항상 피곤에 절은 모습으로 학교에 나타났다.
 반성문도 쓰게 하고, 며칠 동안 남겨서 청소도 시키고, 친구를 시켜 모닝콜도 하게 하고, '어머니 모셔오라'며 협박도 하고, 그 아이의 남자친구와 작전(?)을 꾸미기도 하였으나, 아무런 변화가 없었다. 심지어 반 애들이 "선생님, 걔는 실컷 두드려 패면 말 듣는데요."라고 말하기도 해 그 말에 더 속상하기도 했다.
 
 5월 31일. 내일이면 새로운 달이 시작되는 날이었다. 애들한테 제안을 했다. 물론 걔를 겨냥한 말이었지만, "우리 반 모두가 6월 한 달 동안 지각, 결석이 하나도 없으면, 내가 단합대회비 10만원 만들어 올께"라고. 아이들은 환성을 질렀고, 모두들 00이를 향해 한마디씩 했다. 내일부터 지각하지 마라고. 그 모습을 보는 나는 내심 뿌듯했고 그날 밤 나는 다음날이 궁금해졌다.
 
 6월 1일. 아무렇지도 않은 듯 00이는 10시에 학교에 나타났다. 1교시 수업이 지난 쉬는 시간에 맞추어. 나도, 아이들도 모두 어이가 없었다. 그날부터 00이를 쳐다볼 수가 없었다. 아니, 쳐다보기가 싫었다. 10시에 와도, 11시에 와도 아무 말 하지 않았다. 눈길 한 번 주지 않았다. 다른 선생님들이 시간이 지나면 그런 아이도 다 철이 들고, 졸업만이라도 시켜주는 게 교사의 할 일이라고 했지만, 나의 무능력함을 보여주는 것 같아 무척 속상했다.
 
 그러던 어느 날 그 아이가 아무 말 없이 또 다시 결석을 했다. 다음 날, 나에게 엉덩이를 몇 대 맞았다. 근데, 이게 웬 걸. 그 아이는 너무나 밝은 표정으로 생활지도실을 나섰다. 내가 그 아이에게 눈길을 주지 않았던 것처럼, 나를 모른척하던 그 아이가 나를 보고 밝게 웃는 것이 아닌가.
 이후 나를 쳐다보는 눈길도 부드러워지고, 그 애를 보는 내 시선도 조금은 달라져 있음을 느꼈다. 며칠 되지는 않았지만, 10시, 11시가 아니라 8시가 좀 지난 시간에 교실에 앉아있는 00이의 모습도 보게 되었고, 수업시간에 늦지 않으려고 헐떡거리며 뛰어오는 00이의 모습도 보게 되었다.
 
 글쎄, 무엇 때문에 그 아이의 태도가 조금은 변했는지 아직도 모르겠다. 다만, 자기를 포기해버린 듯 모른척하고 눈길 한 번 주지 않는 내가 무지 싫었을테고, 비록 매이긴 하지만 그 매가 자기에 대한 관심으로 느꼈나, 하는 조금은 인정하기 싫은 결론밖에는.
 
 오늘도 그 아이는 등교시간인 8시에 학교에 오지 못했다. 하지만 9시가 갓 지나 헐레벌떡 교실로 뛰어가는 뒷모습을 보면서, 그 아이에게 조금은 따뜻한 눈길을 보내고 있는 나를 발견하게 된다.
 
 아마, 내일도 '나는 지각문제를 가지고 그 애와 기 싸움을 하고 있겠지' 하는 생각에 피식 웃음이 나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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