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람보'라는 영화가 생각난다. 강인한 체력과 정신력으로 적진을 누비며 적을 섬멸하는 가공할 인간병기 '람보'. 적에게 억류된 미군을 구출하는 영웅적인 줄거리의 영화였다.
람보의 적들은 추풍낙엽처럼, 하찮은 미물처럼 죽고 터지고 폭파당한다. 그리고 영화는 끝난다. 강한 나라 미국, 화려한 병기와 전쟁기술을 자랑하는 영화였다. 그러나 이 영화가 만들어진 배경은 70년대 베트남에서의 미군의 패배와 국민적 좌절에 대한 정치적 보상의 영화였다.
건국이후 하루도 전쟁을 치르지 않은 날이 없었고 패배한 경험이 없는 무서운 나라 미국이 베트남이라는 조그만 동양의 소국에게 엄청난 물량과 인명을 쏟아 부었지만, 결국 패퇴하는 역사적 울분으로 그들의 세계전략은 더욱 호전적인 국가가 된다. 분쟁지역을 누비며 군산복합체제의 공고화를 도모하고, 세계자본시장을 독점하는 세계전략은 결국 탈냉전의 구조를 이끌고, 세계경찰국가임을 자타가 공인하기에 이른다.
그러나 9. 11 테러는 전 세계의 모든 정보력을 갖추고 공격력과 방어력이 우수한 유닛을 보유한 강한 미국의 자존심을 여지없이 꺾어 버렸다. 자신의 신념과 조국이 지고지순의 선을 행한다고 믿고 있던 미국이라는 나라에 엄청난 상처를 안겨준 사건이다. 이 엄청난 비극은 범국민적인 울분을 토해냈고, 그 상처받은 자존심과 국민적 울분의 근본적인 치유보다는 연약한 지지기반을 둔 부시행정부의 정치적 실리를 위한 공격신호가 돼 버렸다.
'빈 라덴'이라는 테러리스트와 아프카니스탄을 초토화시키고, '악의 축' 발언에 이은 대량살상무기보유와 알카에다와 연계한 후세인 정부와의 전쟁을 도발함으로써 그 강한 미국의 힘을 온 만방에 포효했다. 유엔은 안중에도 없고 상호호혜의 외교관행은 깨어졌다. 힘센 놈이 '장땡'이되는 국제사회의 정글화를 만들고 말았다. 오만한 경찰국가와 신자유주의적 세계경영의 네오콘적 전략이 항구적인 미국의 국익임을 과신하게 되고, 그 같은 국익의 수단화가 된 침략전쟁과 폭력이 정당화되는 최면에 스스로 빨려들었다.
부시대통령과 그 일급참모들은 그 최면을 거는 주술사임이 드러났다. 대 이라크전쟁의 명분이었던 대량살상무기와 이라크와 알카에다와의 연계는 미의회공식보고서에서 거짓임이 판명되었고, 아브 그라이브 교도소에서 확인시켜준 비열한 전쟁이다. 미국지상주의에 편성한 왜곡된 기독교우월주의가 세계문명의 발상지이자 평화사랑의 이슬람문화권에 대한 파괴공작행위인 것이다. 자유평등에 기초한 민주주의와 평화사랑의 인류적 양심에 스스로를 부정하고 정면도전한 반인륜적 테러를 자행한 것이다.
그러나 참으로 안타깝게도 이러한 파멸의 주술은 우리나라의 현 정부에게 걸려져있다. 즉 '폭력의 정당화'라는 바이러스에 감염된 노무현정부와 국회는 부시의 주술에 말려든 것이다. 한미동맹이 국민의 생존권보다 우선시되는 국익(?)과 파병철회에 따른 경제적 불이익에 대한 두려움, 그리고 남북문제에 대한 공갈과 협박이라는 주술에 걸려든 것이다.
이제는 되돌아 볼 때다. 주술에서 깨어날 때다. 세계의 냉전구조가 허물어 진 가운데 마지막 분단국가의 한반도에서는 화해의 무드가 조성되고 있다. 동맹국의 승인 없이도 능히 스스로의 문제를 알고 있고 해결의 능력을 갖추고 있는 민족임을 자각할 때이다. 주술사의 노림수가 무엇인지를 냉철히 간파할 수 있는 국민이 있고, 미래의 비전을 구체화할 수 있는 역사적 경험과 저력이 있다.
현 정부는 국민을 믿어라. 국회는 추가파병의 철회를 심도 있고 자유롭게 논의하고 결정하라. 동북아의 중심국가가 되기 위해서 부시의 또 다른 푸들이 되어서는 아니 된다. 정권은 유한하나 국권은 무한하다. 국민은 거리에서 촛불을 들고 국회의원은 국회에서 국민의 소리를 대변하라. 그래서 주술사의 최면에서 노 정권이 깨어나야 민족의 미래가 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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