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 창 밖엔 태풍 ‘민들레’를 따라 왔던 비 그치고 날 들면서 녹음은 더 깊고 맑아졌다. 7월 초순의 뜨거운 햇살 아래 녹음은 환갑, 진갑 다 넘긴 늙은 나무도 아장거리는 어린 나무도 사람의 나이로 하면 스물 예닐곱 한창 때의 청년이다.
법정 스님이 [화엄경]을 번역한 글 서문에 "강원에서는 경전을 배운다고 하지 않고 본다고 한다."는 구절이 있다. 스님은 의미 있는 말이라는 것만 덧붙이고 있을 뿐 ‘배우는 것’과 ‘보는 것’의 차이에 대해서는 설명하지 않았다. 그래서 ‘배우는 것’을 이해로, ‘보는 것’을 체득으로 받아들이려 했지만 ‘본다’의 의미가 제대로 해석된 것이 아니라는 생각을 했다. 그 때 천상병의 시와 친구의 시, 그리고 남진우의 시 한 편이 갑자기 떠올랐다.
나 하늘로 돌아가리라 / 새벽빛 와 닿으면 스러지는 / 이슬 더불어 손에 손을 잡고 // 나 하늘로 돌아가리라 / 노을빛 함께 단 둘이서 / 기슭에서 놀다가 구름 손짓하면은, // 나 하늘로 돌아가리라 / 아름다운 이 세상 소풍 끝내는 날 / 가서, 아름다웠더라고 말하리라.......
천상병의 <귀천(歸天)> 전문
저녁 무렵 아파트 놀이터엔 아이들이 모래장난에 골몰해 있다. 세상의 소음에도 슬슬 무너지는 서쪽 하늘에도 무관심하다. 아슬아슬한 아름다움, 그래서 차라리 슬픔 같기도 한 것이 그들을 감싸고 있다. 그때 어느 베란다 문 열리고 하늘에선 듯 간신히 들리는 목소리, "뭣이야~ 저녁 먹어라~."그러자 갑자기 보글보글 파마머리의 한 계집아이 고개 홱 돌리더니 혼잣말로 "엄마다!"하면서, 그 공들인 모래집들, 살림살이들 간단히 팽개치고 일어선다. 손 탈탈 털고 허공으로 날아오르는 그 뒷모습에서 저녁 햇살은 제 몸을 둥그렇게 구부려 광배(光背)가 된다. 나 어느 날 부름 받으면 저럴 수 있을까. 갑자기 나는 아찔해 진다.
최돈석의 <부름> 전문
천상병의 시는 배워 이해할 수는 있었지만 아직 나는 그 시의 세계를 보지는 못했다. 돌아갈 하늘을 아직 못 봤다. 그러나 ‘나 어느 날 부름 받으면 저럴 수 있을까. 갑자기 나는 아찔해진다.’는 배우지 않아도 잘 보인다.
헌책방 으슥한 서가 한구석 / 아주 오래된 책 한 권을 꺼내 들춰 본다 / 먼지에 절고 세월에 닳은 책장을 넘기니 / 낯익은 글이 눈에 들어온다 / 아, 전생에 내가 썼던 글들 아닌가 / 전생에서 전생으로 글은 굽이쳐 흐르고 / 나는 현생의 한 끄트머리를 간신히 붙잡고 있다 / 한 세월 한 세상 삭아 가는 책에 얼굴을 박고 / 알 수 없는 나라의 산과 들을 헤매다 고개를 드니 / 낡은 선풍기 아래 졸고 있던 주인이 부스스 눈을 뜨고 / 이제 문 닫을 시간이라고 말한다 // 인생은 짧고 낮잠은 길다
남진우의 <낮잠> 전문
세 편 다 내가 좋아하는 시다. 감동으로 읽은 시다. 그래도 나는 돌아갈 하늘도 전생에 내가 썼던 글도 배울 수는 있지만 아직 그것들을 보지는 못했다. 나도 돌아갈 하늘 한 자락 보고 싶고 ‘인생은 짧고 낮잠은 길다’는 경지가 보고 싶다. 그런 경지를 볼 수 있는 길을 걷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