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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산시민신문

[시가 있는 마을] 마주대기..
사회

[시가 있는 마을] 마주대기

양산시민신문 기자 입력 2004/07/20 00:00 수정 2004.07.20 00:00

 잡지를 만들면서 표지 글씨 색을 만들어보려고 이런저런 색을 섞어봤는데 도무지 맘에 드는 색이 나오지 않았다. 그래서 풍경을 찍은 사진과 그림의 한 부분들을 오려서 겹쳐 보았더니 복잡한 것이 지나쳐 단순해진 미묘한 색이 나왔다. 이미 있던 것들을 겹쳐 전에 없던 하나뿐인 새로운 색을 만들어낸 것이다.
 무(無)에서 유(有)를 창조해 내는 것은 우리 인간이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시(詩)라 해서 예외일 수 없다. 시인 역시 이미 있는 말을 풀어내어 자르고 다듬고 갈고 쪼아 한 편의 시를 만든다. 이미 익숙한 것을 다른 낯익은 것이나 낯선 것과 마주대어 닮은 점을 보여주거나 다른 점을 보여줌으로써 지금까지 없었던 것을 그려내는 것이다. 유(有)로써 유(有)를 창조하는 것이다. 마주대기는 고졸(古拙)하면서도 정교한 기법이다.
 
 잔물결 속에 고동이 굴러다닌다 / 들어 보니 / 속이 텅 비었다 / 그 속에 집게가 들어가 살고 있다 / 껍질뿐인 고동을 굴리고 있다 / 그걸 오래 들여다본다 // 문득 이게 나라는 생각 // 나는 살아서도 구른다 / 구르면서 산다 // 구를 때마다 / 품 속의 어둠이 터져 나온다 / 그때마다 / 텅 빈 몸이 텅텅거린다 / 잔물결이 / 껍질뿐인 고동을 굴리듯이 / 오랫동안
 천양희의 < 물결무늬 고동 > 전문
 
 나와 빈 고동 속에 사는 '집게'가 마주대어 있다. 빈 고동과 내 몸이 마주대어 있다. 굴러다니는 고동과 내 삶이 마주대어 있다. 내 육신이 그저 집게가 잠시 빌려서 사는 고동 껍질에 불과하다. 육신만 그럴까. 육신을 빌려 사는 내 마음 역시 잠시 빌린 것에 불과한 것 아닐까. 이러한 산문적 설명으로는 형상화할 수 없는 형상을 마주대기로 창조했다.
 
 "이만 내려놓겠네." // 해인사 경내 어느 숲 속 / 큰 소나무 하나, / 이승으로 뻗은 가지 '뚝'하고 부러지는 소리. // 지상으로 지천인 단풍 / 문득 / 누더기 한 벌뿐인 세상을 벗어 놓는다.
 윤석산의 < 입적(入寂) > 전문
 
 큰 소나무 하나가 이만 내려놓겠다며 이승으로 뻗은 가지 하나 '뚝' 부러뜨려 누더기 한 벌뿐인 세상을 벗어놓는다. 성철 스님의 입적(入寂)이 그려진다. 큰 소나무가 성철 스님을, 내려놓음으로써 이승으로 뻗은 가지 '뚝' 부러지는 소리와 죽음이 마주대어진다. 그리고 울긋불긋한 단풍처럼 요란한 세속의 삶과 누더기 한 벌 뿐인 세상이 대조되어 있다.
 죽음이 이승으로 뻗은 가지 하나 '뚝' 부러뜨려 끊는 것에 불과하다. 나무의 본체는 그대로 있다. 나의 본질은 그대로 있을 뿐이다. 죽음으로 해서 달라지는 것이 없다. 화엄에서 이야기하는 아뢰야식(阿賴耶識)은 그대로일 뿐이다. 마주대기가 아닌 다른 방법으로 표현하려면 얼마나 많은 언어들이 동원되어야 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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