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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산시민신문

[시가 있는 마을] 장날
사회

[시가 있는 마을] 장날

양산시민신문 기자 입력 2004/08/27 00:00 수정 2004.08.27 00:00

 "오늘이 장날이었지?"
 큰형이 선친 제사 끝나고 탕국에 흰밥 먹으며 불쑥 한 마디 한다.
 "장날이면 가칠메기 넘어 오는 장꾼이 하얗게 장사진(長蛇陣)을 이뤘었지. 산안까지 시오리도 넘는 길이었는데."
 "한 사람이 콩 한 말이나 팥 한 말, 아니면 고추 대여섯 근 이고 지고 왔으니 그거 팔아 돈 사봐야 얼마나 됐을까? 돈 없으니 점심이나 저녁 장터국밥 한 그릇 사 먹고 갈 형편 되는 사람들 거의 없었는데도 장날마다 사람들 그렇게 많이 내려왔었잖아. 장터가 세상 돌아가는 이야기 나누고 이런저런 물건 구경도 하는 사교장이었지 뭐."
 
 먹밤중 한밤중 새터 중뜸 개들이 시끌짝하게 짖어댄다 / 이 개 짖으니 저 개도 짖어 / 들 건너 갈뫼 개까지 덩달아 짖어 댄다 / 이런 개 짖는 소리 사이로 / 언뜻언뜻 까 여 다 여 따위 말끝이 들린다 / 밤 기러기 드높게 날며 / 추운 땅으로 떨어뜨리는 소리하고 남이 아니다 / 앞서거니 뒤서거니 의좋은 그 소리하고 남이 아니다 / 콩 팥 김칫거리 / 아쉬울 때 마늘 한 접 이고 가서 / 군산 묵은 장 가서 팔고 오는 선제리 아낙네들 / 팔다 못해 파장떨이로 넘기고 오는 아낙네들 / 시오릿길 한밤중이니 / 십릿길 더 가야지 / 빈 광주리야 가볍지만 / 빈 배 요기도 못하고 오죽이나 가벼울까 / 그래도 이 고생 혼자 하는 게 아니라 / 못난 백성 / 못난 아낙네 끼리끼리 나누는 고생이라 / 얼마나 의좋은 한세상이더냐 / 그들의 말소리에 익숙한지 / 어느 새 개 짖는 소리 뜸해지고 / 밤은 내가 밤이다 하고 말하려는 듯 어둠이 눈을 멀뚱거린다
 고은의 <선제리 아낙네들> 전문
 
 밤이 꼭 깊어서 먹밤중이 아니다. 해 지고 나면 금방 깜깜한 밤이다. 가로등은 고사하고 방 안에 남폿불 하나 제대로 켜지 못하던 때다. 저녁 어스럼이 깔리면 장은 이내 파장이 된다. 이고 온 콩이나 팥, 고추, 마늘 파장떨이로라도 넘겨야 한다. 서둘러 나서서 오릿길, 새터 중뜸까지 왔는데 벌써 먹밤중 한밤중인 것이다.

 이렇게 어두워지고 나면 골목길 나다닐 사람 없다. 파장떨이로 장거리 넘기고 나선 선제리 아낙네들 걸어오는 소리 먼저 들은 개 한 마리 짖는다. 이 개 짖으니 저 개도 짖어 들 건너 갈뫼말까지 시끌짝하게 짖어대는 소리가 나고 이어 "안골네는 뭘 샀으까?" "떨이로 기우 넘겼으이 상게 없을 틴데여."하는 소리가 들리는 것 같다. 밤 기러기 끼룩거리며 날아가는 소리처럼 자연스럽다.

 저녁까지 돈 산 게 없으니 장터국밥 한 그릇 먹지 못해 빈 배다. 낮에 먼저 넘긴 '샛골네'역시 돈이 아깝기도 하고 혼자 먹을 수 없어 빈 배인 것 마찬가지다. 아직 선제리까지는 십리나 남았다. 너나 나나 더하지도 덜하지도 않은 다 같은 처지다. 배고픈 것 고달픈 것 마찬가지다. 차별이 없으니 얼마나 의좋은 한 세상이던가.

 그들의 말소리에 익숙한지 그들이 마을을 다 지나갔는지 어느새 개 짖는 소리도 뜸해지고 어둠이 눈을 멀뚱거리며 밤은 깊어간다.
 
 선제리에 사는 가난한 사람들의 삶의 모습을 사실적으로 그린 시다. 앞서거니 뒤서거니 서로 어우러지는 개 짖는 소리와 아낙네들 말소리가 기러기 소리 같은 자연과 어우러진 소리로 살아 움직이게 하여 너무 잔잔해서 시의 맛을 잃게 할 수 있는 산문적 내용을 시적으로 살려내어 시인이 시집 [만인보]를 통해 드러내려한 더불어 사는 삶의 가치를 잘 형상화했다.
 
 "그땐 밤에 쌀 한 줌씩 가져와서 모둠밥 해 먹고 꺼물꺼물하는 호롱불 아래서 손목 때리기 민화투 치면서도 부러울 게 없었는데."
 이 밤에 5백리 길 돌아가서 아침이면 출근해야 하는 셋째가 일어서는 바람에 이야기는 여기서 끊어지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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