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메뉴 바로가기 본문 바로가기

양산시민신문

[시가 있는 마을] 돼지 추렴..
사회

[시가 있는 마을] 돼지 추렴

양산시민신문 기자 입력 2004/09/10 00:00 수정 2004.09.10 00:00

 "아버지 고등학교, 대학교 다니며 자취할 때 고기 먹고 싶으면 껍질 있는 돼지비계 사다가 먹었다. 비계 껍질째 숭숭 썰어 두꺼운 냄비에 넣고 볶으면 비계는 다 기름이 되고 껍질은 노릿노릿 쫄깃쫄깃해지는데 거기 채 쓴 감자 넣어 볶아 먹는 게 가장 고급 요리였어."
 "우와~ 그건 완전 콜레스테롤 덩어리인데!"
 "콜레스테롤이 모자라 힘이 나지 않던 때였지."
 
 가을걷이 끝나며 들판은 텅 비었다. 멀리 들판 끝 낮은 산자락 돌아가는 신작로를 따라 줄지어 선 미루나무 끝동의 샛노란 단풍마저 무서리 내린 아침에 다 떨어졌다. 넓은 마당을 온통 차지하고 있던 노적가리들 대신에 아침이면 하얗게 서리로 은칠한 짚가리두지만 두 개 덩그러니 서 있을 뿐이다.
 아침나절부터 마을은 수런수런 무언가 흥성스런 분위기였다. 버드나무 테를 먹인 얼기미(성근 체) 하나와 양동이, 바가지 몇 개를 들고 아이들 예닐곱이 미꾸라지 잡으려고 둠벙(웅덩이)을 푸고 있는데 돼지 멱따는 소리가 마을을 뒤흔든다. 둥둥 걷은 바지에 묻은 진흙 그대로 서로 힐끔 쳐다보고는 마을로 뛰어들어보니 넓은 마당에는 장작불을 지핀 가마솥을 세 개나 걸어놓고 동네 아저씨들이 다 모여 시장바닥처럼 왁자하다. 양철동이 하나 가득 받은 피에서 더운 김이 무럭무럭 솟는다. 따놓은 멱에서 아직 쿨럭쿨럭 조금씩 피가 넘어 나오는 농짝만한 돼지에게 가마솥에서 설설 끓던 물을 가져와 붓고 털을 뽑고 칼로 잔털과 때를 밀어내던 선우 아배가 익히지도 않은 돼지 멱언저리를 도려서 피가 듣는 살을 우적우적 씹으며 환하게 웃는다.
 
 거리에는 모밀내가 났다 / 부처를 위한다는 정갈한 노친네의 내음새 같은 모밀내가 났다 // 어쩐지 향산 부처님이 가까웁다는 거린데 / 국수집에는 농짝 같은 도야지를 잡어 걸고 국수를 치는 도야지 고기는 돗바늘 같은 털이 드문드문 백였다 / 나는 이 털도 안 뽑은 도야지 고기를 물구러미 바라보며 / 또 털도 안 뽑은 고기를 시꺼먼 맨모밀국수에 얹어서 한 입에 꿀꺽 삼키는 사람들을 바라보며 // 나는 문득 가슴에 뜨끈한 것을 느끼며 / 소수림왕을 생각한다 광개토 대왕을 생각한다
 백석의 <북신> 전문
 
 향산 부처님을 모신 곳과 얼마 떨어지지 않은 절 아래 거리 가득 메밀내가 난다. 국수집에서 메밀국수를 내리고 있다. 부처를 위한다는 정갈한 노친네 내음새 같은 메밀내가 나는 것이 이 거리와 잘 어울린다. 그런데 그 국수집에서 농짝 같은 도야지를 잡아 걸고 국수를 친다. 절 아래 국수집에서.
 돗바늘 같은 털도 안 뽑은 도야지고기를 일하는 사람들이 시꺼먼 맨메밀국수와 함께 꿀꺽 삼키는 모습을 나는 물끄러미 바라본다. 어질고 어리석기만 할 것 같은 사람들이다. 하지만 그 속에 꿋꿋한 기질이 숨쉬고 있는 것을 느낀다. 소수림왕이나 광개토 대왕 같은 지도자만 만난다면 역경과 시련을 극복하고 외세의 침입으로부터 나라를 지켜 낼 뿐 아니라 경계를 확장할 수 있는 저력이 숨어 있는 것을 가슴 뜨끈한 느낌으로 느끼고 있다.
 
 애들은 이내 대문 밖으로 쫓겨나서 서성거리다가 돼지머리 삶고 순대 삶는 냄새 구수하니, 구릿하니 풍겨오는 담장 밖 골목길에서 굼기놀이, 말타기, 땅뺏기를 한다. 이윽고 아이들도 불려 들어가 양푼이, 바가지에 김치 얹은 돼지기름 둥둥 뜨는 순대국밥 받아 바닥까지 긁어먹고 한 그릇 더 먹을 수 없을까 넘본다.
 
 "밥알 남겨 하수구로 나가면 죽어 아귀(餓鬼) 지옥에 든다고 한다."
 아이들 남긴 쇠고기국 고기 건더기 버리는 것이 죄스러워 국그릇을 내 앞으로 당기는데 집사람이 한 마디 한다.
 "그렇다고 당신 뱃속이 쓰레기통은 아니잖아요. 뱃살 좀 생각해요."

저작권자 © 양산시민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