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단에 선 지 스무 해가 되었다. 푸르기만 했던 머리에는 이제 소금기만 희끗희끗 하다. 책상머리에 추처낭중(錐處囊中)이라 써 두고 자주 보아왔는데 나는 결국 추(錐송곳)가 아니라 추(椎몽치)였던 모양이다.
하늘은 날더러 구름이 되라 하고 / 땅은 날더러 바람이 되라 하네. / 청룡 흑룡 흩어져 비 개인 나루 / 잡초나 일깨우는 잔바람이 되라네. / 뱃길이라 서울 사흘 목계 나루에 / 아흐레 나흘 찾아 박가분 파는 / 가을볕도 서러운 방물장수 되라네. / 산은 날더러 들꽃이 되라 하고 / 강은 날더러 잔돌이 되라 하네. / 산서리 맵차거든 풀 속에 얼굴 묻고 / 물여울 모질거든 바위 뒤에 붙으라네. / 민물 새우 끓어넘는 토방 툇마루 / 석삼 년에 한 이레쯤 천치로 변해 / 짐부리고 앉아 쉬는 떠돌이가 되라네. / 하늘은 날더러 바람이 되라 하고 / 산은 날더러 잔돌이 되라 하네.
신경림의 <목계 장터> 전문
청룡 흑룡이 뒤엉켜 싸우듯 험악했던 날씨는 개었지만 키 낮은 잡초는 비바람과 흙탕물에 뒤범벅이 되어 쓰러졌다. 그 속에서 하늘이 날더러 구름이 되라 하고 땅이 날더러 바람이 되라 한다. 그렇다고 청룡 흑룡을 불러와 민초들의 삶은 뒷전에 두고 천하를 움켜쥐는 일에만 묶여 뒤엉켜 싸우는 크고 험한 구름이나 바람이 되라는 것이 아니다. 그 사나운 비바람에 쓰러지고 다친 잡초 같은 힘없는 민중들 속에 들어가 그들의 아픈 현실을 어루만져 살려내는 잔바람이 되라 한다. 아흐레 나흘 목계 장이 서는 날 찾아와 박가분 파는 방물장수처럼 드러나지 않는 떠돌이가 되라 한다.
민중들의 삶을 어루만지며 이름 없는 사람이 되어 그 속에서 어우러져 살다가 남의 삶은 고사하고 내 삶마저 건사하지 못할 시련이 닥치면 민중 속에 아주 숨어 잠시 피하라 한다. 산서리 맵차거든 풀 속에 얼굴 묻고 물여울 모질거든 바위 뒤에 잠시 붙어 피하라 한다. 그래도 견딜 수 없을 때면 석삼년(9년)에 한 번 한 이레쯤 천치로 변해 민물 새우 끓어 넘는 토방 툇마루에 짐 부리고 앉아 쉬는 떠돌이처럼 천치가 되라 한다. 석삼년에 한 이레쯤은 천치가 되어 세상이야 어찌 돌아가든 그냥 쉬어라 한다.
하늘은 날더러 거창한 구호에 휘말려 힘없는 사람들의 삶을 돌보지 않는 사나운 구름이나 바람이 아니라 민중의 하나가 되어 민중 속에서 그들의 아픔을 어루만져 일깨워주는 사람이 되라 한다.
세상이 시끄러울수록 / 높은 목소리만이 들리고 / 사방이 어두울수록 / 큰 몸짓만이 보인다. / 목소리 높을수록 / 빈 곳이 많고 / 몸짓 클수록 거기 / 거짓이 쉽게 섞인다는 것 / 모르지 않으면서 / 자꾸 그리로만 귀가 쏠리고 / 눈이 가는 것은 / 웬일일까. // 대나무 깎아 그 끝에 / 먹물 묻혀 / 살갗 아래 글자 새기듯 / 살다 가는 일은 / 서러운 일이다. / 낮은 목소리 작은 몸짓으로 / 살갗 아래 / 분노를 감추고 / 살다 가는 일은 / 아름다운 일이다. / 아침 저녁 / 짙푸른 하늘을 머리에 인 / 노고단을 우러르면서.
신경림의 <지리산 노고단 아래 - 황매천의 사당 앞에서> 전문
세상이 시끄럽고 어두울수록 거짓이 섞일 수 있는 큰 목소리 큰 몸짓만 눈에 띄고 거기에 눈과 귀가 쏠릴 수 있다.
먹물 묻혀 살갗 아래 글자 새기듯 죄인의 표찰을 달고 살아가는 것은 서러운 일이지만 낮은 목소리 작은 몸짓으로 억울한 죄인 표찰을 안고 분노를 감추고 아침 저녁 짙푸른 하늘을 머리에 이고 노고단을 우러르는 삶을 사는 것은 아름다운 일이라 하는 것과 ‘산서리 맵차거든 풀 속에 얼굴 묻고 물여울 모질거든 바위 뒤에 숨으라’는 것은 같은 맥락이다. 그때 시인은 얼마나 힘들었을까.
이룬 것 없이 지천명(知天命)이 눈앞이다. 나는 나를 진정으로 던져 이렇게 절박해 본 적이 있었던가?
남을 위한 것이 아니라 나 자신을 위해서라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