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메뉴 바로가기 본문 바로가기

양산시민신문

[詩가 있는 마을] 첫사랑
사회

[詩가 있는 마을] 첫사랑

양산시민신문 기자 입력 2004/10/08 00:00 수정 2004.10.08 00:00

 여름 깊은 그늘이 삭아 / 가을 산을 깨운다 // 고통이 오래 묵어 / 사리를 만들고 // 너는 / 내 속 깊이 사랑으로 녹아 / 잎눈으로 자란다
 졸시(拙詩) <애인1> 전문

 
 올 겨울이면 집사람이랑 결혼한 지 18년이다. 큰놈 작은놈도 이젠 잎눈이 아니라 제법 튼실한 가지가 되었다. 그 가지 끝에 이제 꽃을 매달 나이가 되었나보다.
 "지금 뭐하는 거니?"
 "아무 것도 아니야."
 고등학교 1학년인 큰놈 물음에 중학교 2학년인 작은놈이 조금 당황해하는 목소리로 무얼 뒤로 감추며 대답한다.
 "감춰도 소용없어. 이 냄새. 흠. 엄마 향수냄새네. 새로 빤 체육복에 웬 향수?"
 "비누 냄새가 남았잖아."
 "내 체육복엔 피존 냄새만 나는데? 너 누구 좋아하지?"
 "좋아하긴 누굴 좋아해."
 "고백해 그럼 이 누나가 도와줄게."
 "그런 것 없어." 작은놈이 벌겋게 달은 얼굴로 시침을 뗀다.
 그 아이가 눈에 들어왔던 것은 중학교 2학년 때였다. 키가 컸던 나는 맨 뒷줄에 앉았고 그 아이는 중간쯤 앉아 있었다. 눈이 마주치면 뽀얗게 맑기만 하던 볼이 붉어지고 쌍꺼풀진 눈이 동그랗게 휘어졌다. 가슴 콩닥거리며 그 아이와 하루에도 참 여러 번 눈이 마주쳤다. 그랬으면서도 졸업할 때까지 말 한 번 제대로 나누어보지 못했다.
 나는 고등학교를 서울로 가려 했는데 듣기에 그 아이는 김천으로 간다고 했다. 그래서 김천으로 바꾸어 진학했는데 고등학교 들어가서 보니 그 아이는 김천으로 오지 않았다. 서울로 갔다고 했다.
 

 지금 그 사람 이름은 잊었지만 / 그 눈동자 입술은 / 내 가슴에 있네. // 바람이 불고 / 비가 올 때도 / 나는 / 저 유리창 밖 가로등 / 그날의 밤을 잊지 못하지. // 사랑은 가고 옛날은 남는 것 / 여름날의 호숫가 가을의 공원 / 그 벤치 위에 / 나뭇잎은 떨어지고 / 나뭇잎은 흙이 되고 / 나뭇잎에 덮여서 / 우리들 사랑이 / 사라진다 해도 // 지금 그 사람 이름은 잊었지만 / 그 눈동자 입술은 / 내 가슴에 있네. // 내 서늘한 가슴에 있네.
 박인환의 <세월이 가면> 전문
 

 그냥 그랬다. 그 후 그 아이와는 한 번도 마주치지 않았다. 군에서도, 군에 갔다 와서도, 아마 마흔 되어서도 어쩌다 중학교 때 꿈을 꾸는데 그 아이는 늘 그 때 그 모습이다. 희고 맑던 볼이 붉어지고 쌍꺼풀진 눈이 동그랗게 휘어지는 웃음을 머금은 그 모습 그대로다.
 오전 수업 끝내고 올려다 본 하늘에는 구름 한 점 없다. 이렇게 새파란 하늘을 일 년에 몇 번이나 볼까. 윤동주 시 '소년'의 한 구절처럼 하늘을 한참 들여다보고 있노라면 눈썹에 파란 물감이 들 것만 같다. 하늘과 맞닿은 산마루에 막 단풍이 들기 시작한 영축산 위로 하현달이 부끄러운 듯 고개를 숙이고 있다.
 작은놈의 그 애는 어떻게 생겼을까. 작은놈 가슴 속에 어떻게 들어왔을까.

저작권자 © 양산시민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