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벽 4시 50분, 긴 음으로 울리는 전화벨 소리는 나의 깊은 잠 속으로 파고들고 찰나의 빛처럼 벌떡 일어나 들어보는 수화기, 아무 기척 없이 뚝 끓어지는 음의 뜻을 폐부 깊숙이 산소로 들이키며 길 나설 채비로 분주해지는데 정적에서 깨어난 창 빛 또한 뿌연 먼동에 기지개를 켠다.
모처럼만에 떠나기로 한 '천성산 시담회, 나들이'의 날 햇살은 눈부셔오고, 아침 7시 서창 만남의 장소로 모인 회원님들은 환한 모습으로 12인승 봉고차 시트위에 푸~욱 눌러 앉는다.
서창에서 출발한 우리는 울산에서 두 회원님을 태우고 오늘의 목적지인 경상북도 안동을 향해 울산 톨게이트를 들어서 경부고속도로 위를 달려가던 중 갈림길에서 잠시 머뭇거렸다.
"이리가자! 저리가자!"한참동안 실랑이를 벌이다, 결국 영천 톨게이트를 빠져나와 청송으로 가는 국도를 탔다.
포도로 유명한 영천, 달려가는 길옆 포도밭마다엔 송이송이 포도송이가 알알이 탐스럽고, 청포도의 시인 이육사의 "청포도"시 한편을 떠올려 보면서 굽이굽이 산 고갯길의 노귀재를 넘는다.
"여기서부터는 경상북도 청송입니다”라는 이정표를 따라 달려가니 가도 가도 첩첩산중, 계곡과 산의 어울림만이 우리를 반기는가 싶을 즈음 "청송의 맑은 공기와 물이 빚어낸 연꽃의 향연”에 초대를 한다는 현수막에 이끌려, 잠시 머물러도 될 것 같은 생각으로 경상북도 청송군 부남면 감연리 주왕산 자생식물원 야외전시장엘 들어섰다.
2,000여개의 통을 주문해 통마다 심었다는 연꽃과 수련은 송이 송이로 피어나고, 우리의 마음은 연꽃 향과 자태에 사로잡힌 듯 발길은 떠날 줄 모른다.
그곳 앞 거랑 따라 흐르는 시원한 물소리와 함께 어우러지는 풍경들을 한 폭 그림으로 마음속 스케치를 하면서, 나는 내 고향 청송의 의미를 되새겨본다.
청송은 푸른 소나무가 울창한 고장이다. 옛 선인들도 청송이 '이상의 세계, 무릉도원의 신선세계와 같다'라고 했다는데, 난 어이하여 청송을 떠난 지금에서야 그 의미를 더 짙게 느껴야만 하는가!
청송은 사과와 고추, 잎담배를 주 농업으로 생산하는 곳이다. 평지보다는 비스듬한 산비탈에 더 길게 누워있는 긴긴 밭고랑들 잡초에 묻혀 굽은 허리 펼 줄 모르며 콩죽같이 쏟아지는 땀방울을 그저 옷소매로 슬쩍 훔치는 것이 고작인 삶의 고단함이지만, 이를 숙명적 삶으로 지켜가는 내 고향 사람들 생각들을 탐스럽게 붉어가는 사과 맛처럼 아삭하게 삼켜 가는데 저만큼 '진보'라는 이정표가 다가온다.
'경상북도 청송군 진보면 기곡리(텃골)'가 내 고향 본주소이다. '진보(眞寶)'. 참으로 보배로운 땅으로 사람이 살기에 가장 좋은 곳이라지만 내가 태어나 자란 곳은 그야말로 산간오지, 하늘과 땅이 맞닿을 듯한 하늘아래 첫 동네, 안동으로 가는 길목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이라 잠시 들러보기로 하였다.
우리를 태운 봉고차는 내 고향 마을로 가는 어귀 길 접어들어 강기슭 한적한 음식점에 닿았다. 시장기를 채우기 위해 산채 비빔밥과 멧돼지구이를 안주삼아 소주 한잔 부딪는 소리에 짜릿하게 전해오는 옛 추억들…. 이젠 저 푸른 물빛 속에 잠겨 흔적 잃고 출렁인다.
"저만큼 달려가는 작은 계집아이야, 이십 리 길 넘는 산 고갯길 넘고 넘어 강기슭 거슬러 학교가는 길에 달그랑거리는 필통 속에 연필심이 가루되는 줄도 모르는 바보였던가!"
억수같이 퍼부어대는 빗줄기에 넘실넘실 불어난 강을 건너려다 빙빙 돌아가는 회오리물살에 갇혀 허우적거리던 그 아이가 사십이 넘어선 지금에야 다시 여기서서 추억 속으로 푸~욱 잠겨보는데… 어디서 불어오는 바람인가 고향산허리를 휘~익 휘감아 치며 먼저 재를 넘어 앞선다.
첩첩 두메산골 내 고향 기곡리(텃골). 이런 곳에도 사람이 사느냐며 난생 이런 산간 오지는 처음 봤다는 회원님들은 어느 딴 세계를 온 듯한 표정들을 그려낸다. 차를 세운 곳은 경로당 마당, 예전에는 논이었던 곳이 이젠 공터로 변해 우리의 첫걸음을 반긴다.
바로 이집이 나의 옛집이었다며 가리키는 마음이 꼭 첫 선보이러 나온 처녀처럼 두근거리며 설레는 것은 무슨 이유일까?
조경혜 / 영산대학교 평생교육원 시창작반 수강생
<다음 호에 이어짐>